[테마베이스볼] 공룡이 된 한국야구…이젠 ‘제2의 장명부’는 없다

입력 2010-12-0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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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K에 입단한 김대유는 한국프로야구에 들어온 37번째 재일교포 선수다. 일본프로야구 한신에서 뛰다 방출돼 김성근 감독의 선택을 받은 그가 어떤 활약을 펼치느냐에 따라 향후 재일교포의 한국무대 도전사에도 영향을 미칠 듯하다.

SK김대유를 통해 본 한국프로야구 ‘재일교포 진출사’
1983년 구단별 전력 평준화 위해 문호개방
장명부 30승 활약 최약체 삼미 선두권 우뚝
김일융·홍문종 등 초창기 ‘태풍의 눈’ 부상

90년 후 확 줄어…김대유 37번째 한국 진출
日 주전급 와야 통해…한국도 용병에 눈길
한-일 연봉격차도 재일교포 입단의 장애물
SK가 김대유(27)를 영입하면서 재일교포 선수의 한국프로야구 진출사 끈이 다시 이어졌다. 2009년 한화 유니폼을 입은 강병수 이후 2년 만이며, 한국 프로팀에 입단한 역대 37번째 재일교포 선수로 기록됐다. 김대유를 통해 한국프로야구속 재일교포 선수의 역사를 살펴본다.


○초창기 프로야구 태풍의 눈 재일교포


한국 프로야구는 출범 이듬해인 1983년부터 재일교포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당초에는 1985년부터 재일교포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원년에 삼미가 0.188의 형편없는 승률로 꼴찌(6위)로 처진 데다 야구열기가 남다른 영호남의 롯데 해태마저 하위권인 5위와 4위로 부진하자 전력평준화를 꾀하기 위해 계획을 2년 앞당겼다.

일본프로야구의 전설을 쓴 재일교포 장훈이 중간다리를 놓았다. 재일교포 첫해에 삼미는 투수 장명부와 내야수 이영구, 해태는 투수 주동식과 김무종을 배정받았다. 이들은 모두 일본프로야구 출신. 입단하자마자 소속팀은 물론 프로야구 전체에 회오리를 몰고 왔다. 주동식과 김무종은 당장 해태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너구리’ 장명부는 무려 30승 6세이브를 올리며 전년도 최약체였던 삼미를 선두권으로 올려놓았다. 이영구 역시 공수에서 알토란 같은 역할을 했다.

이듬해인 1984년에 들어온 김일융(삼성), 홍문종(롯데), 최일언(OB)도 태풍의 눈이 됐다. 요미우리 출신의 김일융은 84년 16승을 거두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고, 85년에는 25승으로 김시진과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오르며 팀을 통합 챔피언으로 인도했다. 둘이 합작한 50승은 역대 원투펀치가 거둔 시즌 최다승 기록이다. ‘황금박쥐’라는 별명을 얻은 김일융은 3년간 무려 54승을 거둔 뒤 다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했다. 홍문종은 84년 한국에 오자마자 0.339의 고타율을 올렸다. 타율관리에 들어간 이만수(0.340)에게 타격왕 타이틀을 내줬지만 팀을 한국시리즈로 견인했다.

현 SK 투수코치인 최일언은 첫해에는 9승에 그쳤지만 85년 10승, 86년 19승, 87년 14승을 거두며 주가를 올렸다. 1986년 빙그레에 입단한 고원부는 1989년 타격왕을 차지하면서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핵으로 맹활약했다.

1985년 롯데에 입단한 김정행은 이듬해인 1986년 한국프로야구사상 2번째 노히트노런을 달성했고, 1986년 청보 유니폼을 입은 김기태와 김신부, 1987년 삼성에 둥지를 튼 ‘부시맨’ 김성길, 1988년 OB에 입단한 송재박(현 OB 타격코치)도 팬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프로야구 초창기 재일교포 선수들은 한국프로야구를 뒤흔들었다. 재일교포의 문호를 처음 개방한 1983년에 한국땅을 밟은 삼미 장명부는 불멸의 30승을 기록했다. 같은 해 해태 유니폼을 입은 김무종은 전년도 하위권의 팀을 곧바로 우승으로 이끌었다. 1984년 롯데에 입단한 홍문종은 타격왕 싸움을 했고, 김일융은 1985년 25승을 수확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한국무대로 발길을 돌린 김성길 이후로 재일교포 선수는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스포츠동아 DB]



○1990년대 중반 이후 시들해진 재일교포 활약상

사실상 국내프로야구에서 주전급으로 제대로 활약한 선수는 1994년 삼성에 입단한 외야수 김실이 마지막이다. 김실은 1996년 쌍방울, 1998년 시즌 도중 OB로 유니폼을 갈아입으면서 2000년까지 7년간 한국무대에서 활약했다. 김실을 제외하면 이름조차 거의 기억 나지 않을 정도로 활약이 미미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한풀 더 꺾였다. 2003년 한화에 입단한 고지행이 2003년 삼성 이적 후 잠시 2루수로 뛴 것이 최고활약 수준이다. 2002년 LG에 온 외야수 이일의는 백업 외야수로 뛰었고, 2003년 LG 유니폼을 입은 투수 김진유는 2년간 1군에서는 6경기에 등판해 6.1이닝을 던진 것이 전부였다. 2006년 롯데와 계약한 외야수 김용강은 1군무대를 밟아보지조차 못했다. 지난해 한화에 입단한 강병수는 1군에서 16경기에 나섰지만 안타 없이 보따리를 쌌다.



○재일교포 선수의 성공이 갈수록 어려운 이유

초창기와 달리 갈수록 재일교포 선수들의 활약이 떨어지는 이유는 여러 각도로 해석된다. 우선 우수한 재일교포 선수들이 한국무대로 오지 않으려는 현상 때문이다. 1980년대에 맹활약했던 선수 중에는 일본프로야구에서도 팀내 주축 투수와 타자 출신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이들은 모국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는 선수가 많았다. 그러나 갈수록 이런 현상은 약화되고 있다. 한재우 전 재일대한야구협회장은 “지금도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는 수준급 재일교포 선수가 꽤 있지만 3세, 4세로 넘어가고 있다.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더라도 일본 여자와 결혼하는 선수가 많다. 기량이 좋은 재일교포 선수 중에 한국까지 가서 야구를 하려는 선수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뛸 때 받을 수 있는 연봉을 한국에서 제시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FA 제도가 도입된 뒤 한국도 선수의 몸값이 뛰었지만 일본도 폭등했다. 한국과의 연봉 수준이 더 크게 벌어졌다. 또한 한국프로야구의 수준이 급격히 향상된 점도 재일교포 선수가 성공하기 어려운 요인 가운데 하나다. 일본에서 주전급으로 뛰는 선수가 아니라면 한국에서도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여기에다 한국 구단들이 전력향상을 위해서는 외국인선수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번에 SK에 입단하는 김대유가 역대 37번째 재일교포 선수지만, 1998년 외국인선수 제도가 도입된 뒤 한국땅을 밟은 외국인선수는 300명을 넘었다.

김대유는 2005년 한신에 입단했지만 2군에만 머물다 올 시즌 후 방출됐다. 최근 일본 고지 SK 캠프에서 김성근 감독 앞에서 테스트를 받고 합격점을 받았다. 5000만원의 연봉과 그의 경력으로 보면 곧바로 내년 시즌 1군 주축 투수로 자리잡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김성근 감독 역시 “키워서 쓰겠다”고 평가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김 감독 역시 재일교포 출신으로 최일언 김실 등의 한국무대 적응을 도운 경력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김대유가 한국에서 성장해 재일교포 선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스포츠동아 DB·SK 와이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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