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Let’s Go Baseball] ‘야도’ 꿈꾼 그들, 야구를 가슴에 묻고…

입력 2012-12-2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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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은 외로운 돌격대였다. 모기업의 빈약한 지원 때문에, 한국프로야구사의 대표적 ‘약팀’으로 기억된다. 사진은 1994년 제주도 마무리훈련 도중 용두암에서 기념촬영을 한 쌍방울 선수단. 스포츠동아DB

쌍방울은 외로운 돌격대였다. 모기업의 빈약한 지원 때문에, 한국프로야구사의 대표적 ‘약팀’으로 기억된다. 사진은 1994년 제주도 마무리훈련 도중 용두암에서 기념촬영을 한 쌍방울 선수단. 스포츠동아DB

10구단 경쟁 전주·수원, 과거엔 어떤 일이…

쌍방울, 해태 견제 위한 ‘호남 쪼개기’의 산물
빈약한 지원속 고군분투…IMF 충격파에 와해



현대, 99년 홈 개막 관중 차지않자 수원행 결단
현대가 ‘왕자의 난’이후 표류하다 결국엔 최후


제10구단 창단을 놓고 수원과 전주의 경쟁이 치열하다. 두 도시는 모두 ‘첫 사랑의 연인이 예고 없이 떠난’ 듯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1990년 3월 전주를 연고로 창단했던 쌍방울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사태의 회오리 속에 1999년 와해됐다. 전주구장은 이후 빈 집이 됐다. 2000년 인천을 포기하고 수원으로 옮겼던 현대는 진정한 수원연고팀이 아니었다. 서울 입성 전 임시로 수원에 기거했다. 현대는 2000년과 2003∼2004년 우승을 차지했지만, 수원팬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 현대도 2007년을 끝으로 사라졌다. 수원구장도 이후 프로야구와 생이별했다.


○1989년 수원구장 개장-전주 쌍방울 제8구단 선정

1989년 4월 2일 수원구장이 개장했다. OB-태평양의 개장기념경기가 열렸다. 당시 수원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광역연고권을 보유한 태평양의 땅이었다.

제7구단 빙그레가 1986년 리그에 참가하면서부터 제8구단의 탄생은 필연적이었다. 1989년에도 두 도시가 경쟁했다. 마산과 전주였다. 마산에선 한일그룹이 나섰다. 마산을 포함한 경남팬들의 야구열기를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다. 전주에선 쌍방울과 미원이 합동으로 창단을 선언했다. 그해 3월 8일 구단주총회에서 신생팀 창단에 대한 기본원칙이 정해졌다. ▲모기업 매출 5000억원 이상 ▲프랜차이즈 내 현대식 구장 확보 ▲50억원 이상의 가입금 납부 등이 조건이었다. 그러자 4월 한일그룹은 “경쟁까지 하면서 야구단을 만들 생각은 없다”며 물러섰다. 결국 7월 9일 구단주총회에서 제8구단의 주인이 결정됐다. 최종승자는 전주였다.



당시의 결정은 너무도 정치적이었다. 비극을 안고 있었다. 또 쌍방울은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기에는 자격미달이었다. 매출 규모가 5000억원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편법으로 동향기업 미원의 이름을 빌렸다. 쌍방울 70%, 미원 30%의 비율로 투자한다고 했으나 제8구단 창단을 승인 받은 뒤 미원은 빠졌다.


○왜 전주의 쌍방울이었나?

당시 결정권을 쥔 구단들의 속셈은 같았다. 해태를 견제하고 싶었다. 해태는 1986년부터 3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천하무적이었다. 호남 연고를 쪼개면 해태의 전력이 약화될 것으로 기대했다. 정치적 계산도 끼어들었다. 똘똘 뭉친 호남인들의 마음을 어떻게든 분리하고 싶었다. 이들은 선거와 표를 생각했다. 한일그룹은 “기회가 된다면 다시 도전하겠다”고 했으나 운명은 외면했다. IMF가 꿈을 날려버렸다. 마산지역 야구팬들의 희망은 2013년 NC 다이노스의 1군 참여로 현실이 됐다.


○인천을 포기한 현대, 수원에서 방황하다!

태평양을 인수해 1996년 프로야구에 뛰어든 현대는 탐욕스러웠다. 현대의 프로야구 진출을 꺼려한 타 구단들의 견제에 상상 못할 방법을 동원했다. 아마팀을 창단해 대졸 유망주들을 싹쓸이하며 압박했다. 현대는 1998년 사상 처음으로 인천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선사했다. 1999년 홈 개막전. 전년도 우승팀의 시즌 첫 경기인데도 관중석이 차지 않자,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택한 수원이었다. 서울에 새 야구장을 지어서 큰 뜻을 펼치겠다는 생각으로 정한 임시거처.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왕자의 난’ 이후 현대 유니콘스에 대한 지원은 눈에 띄게 줄었다. 2000년 SK가 쌍방울을 흡수해 인천에 새로 터를 잡았다. 현대는 서울로 들어가지도, 인천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표류했다.


○IMF 시절 전주의 슬픈 이야기

쌍방울이 반짝했던 때가 있었다. 1996년. 김성근 감독의 ‘벌떼 야구’로 사상 처음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현대와의 플레이오프. 전주에서 벌어진 1·2차전을 연달아 잡으며 한국시리즈 진출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끝내 현대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쌍방울은 1997년 다시 한 번 힘을 냈지만, 다시 주저앉았다. 모기업의 지원이 줄어들자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주전 선수들을 모두 팔고 남은 선수들은 여관에서 잤다. 식당에서 외상으로 밥을 먹으며 간신히 버텼다.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기자는 ‘주인 없는 전주구장’을 보면 슬픈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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