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화수분 야구’의 저력을 찾아서 <상>

입력 2016-11-07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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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의 한국시리즈 2연패와 2016년 통합우승 뒤엔 ‘육성’이란 단어가 자리 잡고 있다. 유망주를 직접 길러내 팀의 주축으로 키우기까지 두산이 자랑하는 ‘화수분 야구’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2일 마산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 감격을 나누고 있는 두산 선수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사람이 미래다. 두산그룹의 지향을 두산 야구단은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했다. 적절한 인재들이 모여서 최적의 루트를 개척했다. KBO리그에서 해태, 현대, 삼성, SK 등이 왕조를 건설했다. 그러나 두산은 슈퍼스타, 자금력, 지도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한 이들 팀들과 달리 오랜 기간 ‘숙성’을 거쳐 왕조의 기틀을 구축했다. 그래서 한국시리즈 2년 연속 우승을 해냈음에도 야구계에서는 ‘아직 두산의 정점이 오지 않았다’고 평한다. KBO리그의 지배자로 떠오른 두산의 저력을 탐구해본다.

어느덧 두산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말이 ‘육성’이 됐다. 두산 프런트의 안목과 뚝심이 돋보인다. 그러나 프런트의 뜻을 현장에 투여하지 않으면 공허한 소리다. 두산은 많은 감독들을 임명했고, 저마다 캐릭터는 달랐지만 늘 ‘육성에 공감하는 감독’을 뽑았다. 어쩌면 감독조차도 육성시켰다.

오늘날 두산 야구의 산증인이자 설계자인 김태룡 단장은 경기도 이천의 과거 OB 맥주 기숙사가 두산 화수분야구의 발원지라고 생각한다.

“1994년 항명에 따른 선수단 집단이탈 사건을 겪었다. 1997년 말 IMF 구제금융이 닥쳤다. 이런 일들을 거치며 고참선수들을 정리해야 될 상황이었다. 미래를 준비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당시 기숙사에 공실을 만들어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를 들여와 실내연습장으로 개조했다. 선수들 식사를 위해 컨테이너 건물을 식당으로 급조했다. 선수 10명, 코치 1명, 트레이너 1명, 사무직원 1명으로 출발했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선수는 프런트와 코치들의 미팅으로 골랐다. 잠재력 기준이었다.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면 다른 2군선수로 바꿨다.

두산 김태룡 단장.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까지만 외출을 허용했고, 화요일부터는 이곳에서 먹고 자고 훈련했다. 실질적 2군의 이원화인지라 불편한 것이 1~2개가 아님에도 강행했다. 가령 2군선수 중에서 숙소조와 출퇴근조가 따로 움직여야 될 상황이라 버스가 여러 대 필요했다. 2군 전용버스 외에도 관광버스를 빌리고, 두산 핸드볼 팀의 버스를 지원받고, 1군이 홈에 있으면 1군 버스의 도움을 받았다.

숙소조 선수들을 위한 물품도 따로 공급해야 했는데 모기업 사정이 좋지 못할 때라 외국인선수 숙소에서 침대 시트와 세탁기 등을 가져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예상 이상의 경쟁효과가 발생했다. 숙소조에 발탁되지 못한 2군 선수들이 오기를 갖고, 더 분발하게 된 것이다.

두산그룹은 IMF를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OB맥주를 네덜란드 회사에 넘겼다. 2군구장 토지까지 당연히 팔렸다. 이후 중공업 주력사로 더 큰 회사가 된 두산그룹은 이천 땅에 베어스필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5년 박정원 두산 구단주이자 그룹 회장의 지시로 베어스파크로의 업그레이드가 완성됐다. 6년 된 건물을 다시 짓는 과정에서 박 구단주의 배려에 따라 1인1실로 지어졌다. OB맥주 기숙사 시절과 격세지감을 느낄 법하다. 그러나 1983년 최초로 2군 야구장을 만들었던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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