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시즌이 완전히 끝나진 않았지만, ‘도드람 2020~2021 V리그’ 개막 이전의 기대치를 고려하면 지금 흥국생명의 행보는 초라한 게 사실이다. ‘어우흥(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시즌을 시작했으나, KOVO컵과 정규리그 우승은 모두 GS칼텍스의 차지였다. 흥국생명은 2인자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초대형 악재를 버텨낸 과정을 돌아보면, 절대로 지금의 성적을 폄훼할 수 없다.

배구에서 주전 세터와 레프트의 비중은 엄청나다. 세터는 팀의 공격을 조율하는 야전사령관이다. 그만큼 공격수들과 호흡이 중요하다. 꾸준히 손발을 맞춰온 주전 세터의 이탈은 엄청난 치명타라는 의미다. 주전 레프트도 마찬가지다. 30%가 넘는 공격 점유율과 25% 이상의 리시브 점유율을 보인 레프트의 이탈은 팀의 밸런스를 무너트린다. 흥국생명은 2월 11일부터 과거 학교폭력에 따른 징계를 받은 세터 이다영과 레프트 이재영을 빼고 경기를 치러야 했다.

팀에는 선수 2명이 이탈한 것 이상의 후폭풍이 몰아쳤다.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은 연일 고개를 숙여야 했고, 팀 분위기도 최악이었다. 이재영-다영 자매의 비중이 절대적이었기에 그 대체자를 낙점하는 과정 또한 험난했다.

박 감독과 주장 김연경은 선수들의 멘탈(정신력)을 다잡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김연경은 심한 기복 탓에 자신감을 잃었던 외국인선수 브루나 모라이스를 따뜻하게 안아줬다. 브루나 덕분에 이기는 경기가 나오면서 젊은 선수들도 자신감을 찾아갔다. 경험이 부족한 리베로 도수빈과 만년 백업 세터 김다솔이 자신감을 회복한 비결도 여기에 있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규리그 4라운드까지만 해도 흥국생명의 스쿼드는 백업 선수들의 무덤과 같았다. 코트를 밟을 기회 자체가 마땅치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기량을 인정받아 ‘조커’로 나서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라이트 이한비가 여기에 해당한다. 손가락 부상으로 이탈한 김세영의 공백은 신인왕 출신 김채연이 효과적으로 메웠다. 절대 채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틈이 조금씩 줄었다. 조직력을 강화한 덕분에 팀 컬러인 ‘거미줄 배구’도 살아났다. 랠리가 증가한 것은 조직력이 강해졌다는 증거다.

아직 시즌은 끝나지 않았다. 당장 30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릴 GS칼텍스와 챔피언 결정 3차전이 남아있다. 그 결과가 어떻든 흥국생명의 올 시즌을 실패로 규정할 순 없다. 황폐화한 토양에서 백업의 성장과 ‘원팀’의 가치를 깨달은 것만으로도 큰 성공이다. 이 과정에서 박 감독과 김연경은 리더의 자격을 다시금 인정받았다. 이미 흥국생명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

강산 기자 posterbo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