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명장 필립 블랑 현대캐피탈 감독은 컵대회 정상 탈환으로 새 시즌 V리그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적극적인 토론에 익숙한 그는 선수 개개인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실용 배구’로 현대캐피탈을 성장시키려 한다. 사진제공|한국배구연맹
‘명가 재건’을 선언한 현대캐피탈이 최고의 분위기에서 2024~2025시즌 V리그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현대캐피탈은 지난달 28일 끝난 ‘2024 통영·도드람컵 프로배구대회(KOVO컵)’ 남자부에서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결승에서 만난 ‘당대 최강’ 대한항공을 풀세트 접전 끝에 따돌리고 정상에 우뚝 섰다. 2006, 2008, 2010, 2013년에 이은 통산 5번째 우승이다.
‘프랑스 명장’의 힘을 빼놓을 수 없다. 모국 남자대표팀 사령탑과 폴란드남자대표팀 수석코치로 활동한 필립 블랑 현대캐피탈 감독(64)은 2017년 일본남자대표팀 코치로 부임해 2022년부터 사령탑으로 재임했다. 일본은 그의 지도 속에 올해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 준우승을 차지하고, 세계랭킹 4위까지 도약하는 등 급성장했다.
2024파리올림픽 이후 합류해 현대캐피탈을 지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나, 선수 개개인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블랑 감독의 ‘실용 배구’는 이미 빛을 발하고 있다. 특히 외국인 공격수 레오와 아시아쿼터 신펑, 주장 허수봉이 이룬 삼각편대는 컵대회를 통해 완벽에 가까운 하모니를 뽐냈다. 컵대회 종료 후 KB손해보험과 트레이드를 통해 데려온 베테랑 세터 황승빈과 호흡만 확실하게 다져지면, ‘대한항공 천하’에 큰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평가다.
최근 충남 천안의 클럽하우스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에서 만난 블랑 감독은 “나도 한국과 인연이 닿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으나, 모든 것은 열려있고 일어날 수 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향한 갈망이 컸다. 매력적이고 흥미로웠다. 정말 기대되는 도전”이라며 활짝 웃었다.
-왜 현대캐피탈을 선택했나?
“팀을 옮길 때마다 비슷한 뉘앙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폴란드에서 일본으로 향했을 때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난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현대캐피탈에서 제안한 프로젝트는 정말 흥미로웠다. 충분한 시간(계약기간)을 부여받았고, 성공적으로 팀을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떤 프로젝트를 제안받았는지.
“선수들의 질적 향상이다. 이 팀의 역사와 전통을 알고 있다. 정상 탈환에 대한 열망을 확인했다. 그런데 성적만 요구하지 않았다. 한국 선수들을 최대치 레벨로 성장시켜달라고 했다. 방향은 명쾌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도전할 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현대캐피탈에 대한 파악은 이뤄졌나?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현대캐피탈의 인프라를 보면서 놀라웠다. 완벽한 훈련시설과 회복을 위한 장치가 충분히 마련돼 있다. 좋은 느낌이 있다. 선수들에 대한 파악은 어느 정도 이뤄졌다. 단기적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또 장기적으로는 어떤 목표를 수립해야 할지 거듭 고민하고 있다.”
-자신의 배구 철학은 무엇인가?
“지도자에게 맞추는 배구는 한계가 있다. 선수의 성향에 따르는 배구를 선호한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게 행복한 배구, 좋은 배구다. 다만 딱 하나 강조하는 것은 범실 최소화와 강한 정신력이다. 완성된 팀까지는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일본도 세계랭킹 14위에서 6위, 그 이상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우리도 급격한 변화를 꾀하기보다 단계를 밟아가며 발전하려고 한다.”
-오랫동안 대표팀을 이끌었다. 클럽과는 다르지 않나.
“이탈리아, 프랑스, 폴란드에서 많은 팀을 거쳤다. 클럽은 많은 시간을 선수들과 함께할 수 있다. 대표팀은 2주간 대회를 준비하고 일정 기간 휴식하는 패턴인데, 클럽은 꾸준히 경기가 있고 시즌은 장기 레이스다. 클럽은 오늘보다 다음 경기를 더 잘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있다.”
-현대캐피탈에선 무엇을 이루고 싶나?
“당연히 우승을 바라본다. 작은 대회라 할지라도 성과는 필요하다. 이를 위해 실용적 배구에 집중할 생각이다. 매 경기 우리 선수들의 단점을 줄여가고, 장점을 조금씩 높여간다면 자연스레 성적이 따라온다.”
현대캐피탈은 비시즌 해외 팀과 합동훈련을 꾸준히 진행했다. 9월에는 JT 썬더스(일본), 10월에는 베이징 바이크모터스(중국)를 초청했다. 선수들을 위한 선택이다. 다양한 배구를 접하면서 각자의 능력을 확인하고 개선하자는 취지다. 연습경기부터 V리그 팀들과 자주 하는 것은 동기부여가 떨어진다고 봤다. “다른 배구, 다른 플레이, 다른 패턴을 꾸준히 하면 자극제가 된다”는 것이 블랑 감독의 설명이다.
-일본의 발전이 놀라웠다. 우리 선수들과 차이는 무엇인가.
“오래전 제3자로 아시아 배구를 봤을 때 한국 선수들은 좋은 결정력과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다. 최근 흐름이 조금 바뀐 듯하다. 한국과 일본이 신장의 핸디캡을 이겨내려면, 우수한 기술이 중요하다. 특히 리시브 수비가 강해야 한다. 일본에서 이 점을 주목했고, 효과를 봤다. 현대캐피탈에서도 리시브를 많이 신경 쓴다. 안정적으로 볼을 받아줘야 공격 효율을 높일 수 있다. 효율적 수비가 뒷받침되면 한 걸음 성장한다. 이후에는 서브와 블로킹 강화다.”
-선수들에게는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틈이 날 때마다 선수들의 생각을 들으려고 한다. 많은 대화를 나눴고, 유의미한 정보를 얻었다. 난 많은 질문을 하기보다는 듣는 데 익숙하다. 허수봉과 레오처럼 경험 많은 선수들이 특히 많은 질문을 한다. 내적 성향의 선수들도 있는데, 활발한 토론을 위해선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데, 앞으로 더 바뀌었으면 한다.”
천안|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