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시상식에서의 이지현 9단(왼쪽)과 신진서 9단.     한국기원 제공

4월 23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시상식에서의 이지현 9단(왼쪽)과 신진서 9단. 한국기원 제공




결승 1국 대마 사냥, 2국의 반격, 3국의 완벽한 수읽기…숨 멎는 드라마
초읽기 피셔 방식 속 흔들림 없는 묘수…신진서 대마를 두 차례 제압
실수를 기다리지 않았다…정공법으로 쓴 입신 최강의 이름
바둑은 말이 없는 싸움이다. 말 없는 전쟁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오직 ‘수’다. 수 하나에 무너지고, 수 하나가 살아나는 동안 대국자는 속을 까맣게 태운다. 영혼에 기름을 끼얹는다.
4월 7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 세계 최강 신진서 9단이 178수 만에 무너졌다.

● 결승 1국 : 그날, 대마는 죽었다

3월 31일 열린 1국은 대마가 죽은 날이었다. 반상에 돌이 많지도 않았다. 94수의 단명국. 빠르게 끝났고, 망설임도 없었다. 이지현 9단은 초반부터 큰 승부수를 던지지 않았다. 차분하게 포석을 쌓았고, 전투로 국면이 옮겨가자 신진서의 대마를 노렸다.

결국 신진서의 중심 대마가 포위됐다. 백의 치명적인 연타가 들어갔고, 거대한 대마는 숨을 거뒀다. 신진서 9단이 손을 떼는 순간 이지현은 ‘믿을 수 없는 1승’을 거머쥐었다. 세계 랭킹 1위가 흔들렸다.

● 결승 2국 : 반격은 강했다. 그래서 더 버텨야 했다

4월 2일, 경기도 가평 마이다스리조트. 장소가 바뀌자 바람이 달라졌다. 신진서가 다시 무거운 공기 속으로 이지현을 몰아넣었다. 이 바둑은 초반 50수까지 팽팽했다. 그러나 신진서가 균형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지현은 수싸움에서 밀렸다. 중앙에서 나온 신진서의 변화수가 절묘하게 작용했고, 점차 격차가 벌어졌다. 164수 만에 이지현이 돌을 거뒀다. 다시 1승 1패,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신진서는 “1국은 내용적으로 많이 아쉬웠다. 2국은 끝까지 집중하자 생각했고, 그게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3국에서 다시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로 들렸다. 세계 최강자의 말이었다.

● 결승 3국 : 침착하라 … 이지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4월 7일, 다시 서울. 마지막 한 판. 가장 조용하면서 요란한 전쟁이 재개됐다.
3국은 이지현이 전체를 끌고 간 바둑이었다. 초반 포석에서 신진서의 정석을 피했고, 백의 세력을 강화해 승부를 길게 가져갔다. 흑(신진서)의 압박에도 좌우를 연결하며 두터움을 만들었다.

중반 이후, 신진서의 승부수가 시작됐다. 좌상귀에서의 전투, 중앙으로의 확산. 그러나 이지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빈틈을 만들지 않았고, 중심의 두터움을 전투력으로 바꾸었다.

결국 또 한 번의 대마 전투가 벌어졌다. 신진서의 집이 무너졌고, 178수 만에 이지현의 두 번째 불계승이 완성됐다. 손끝으로 쓴 승리일지. 그는 세계 바둑최강자를 끈질긴 수읽기와 정확하고 침착한 계산의 힘으로 버텨 이겨냈다.

이번 우승은 이지현 9단의 통산 세 번째 타이틀이자, 2020년 제21기 이후 5년 만의 맥심커피배 정복이다. 동시에 신진서와의 상대전적도 3승 11패에서 6승 12패로 좁혔다.

올해 이지현은 22승 4패, 승률 84.61%. 2024년 4월 기준 16위였던 랭킹은 2025년 4위까지 상승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박영훈, 백홍석, 최정, 강동윤을 꺾고 결승에 올랐다.

반면 신진서는 김은지, 한상훈, 박정환, 변상일을 연파하고 결승에 진출했지만, 마지막 3국에서 다시 대마를 헌납하며 대회 3연패 도전에 실패했다. 국내대회 준우승은 2022년 10월 제45기 명인전 이후 약 2년 6개월 만이다.

이번 대회는 동서식품이 후원하고 한국기원이 주최·주관했다. 제한시간은 각자 10분에 초읽기 30초가 주어지는 피셔방식으로, 1월 6일 개막해 약 석 달간 치러졌다. 시상식은 4월 23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렸다.

시상식에서 우승 트로피를 쥔 이지현 9단은 말했다.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기쁘다. 상대가 강해서 실수를 노리기보다, 내가 더 잘 두려 했다.”

이지현의 우승은 기적이 아니었다. 기대 대신 준비를 선택한 승부사가, 가장 강한 자를 넘었을 뿐이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