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현기자가간다] 2군리그주무및장비담당체험

입력 2009-09-23 0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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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너 플랙을 그라운드에 박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음이 삐뚤어진 탓일까. 크게 바람이 분 것도 아니었지만 유독 남장현 기자가 꽂은 깃대만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대전 |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그들만의 열정, 그들만의 리그.’

그들 외에는 누구도 환호하지 않았고,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직 초록 그라운드에는 그들만이 존재했고, 스탠드는 썰렁했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비록 외롭고 기약도 없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지만 공동의 목표가 있기에 외로움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터. 아무도 돌봐주지 않고, 관심도 가져주지 않았던 그들의 삶. 프로축구 R리그(2군 리그)에서 장비 담당 및 주무를 체험하며 조금이나마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입원한’ 사수 대신 부사수의 도움을 받으며

프로축구 2군 선수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들의 모습을 살피기 위해 찾은 곳은 대전월드컵 경기장 내 대전 시티즌 사무국이었다. 17일은 대전과 광주 상무의 2009 R리그 11라운드 경기가 예정돼 있었다. 방문에 앞서 프로축구연맹에 ‘체험 취재’를 문의했을 때,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 했다. 팀 벤치에 앉기 위해선 반드시 연맹 인가를 받은 구단 직원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소위, 벤치에 앉을 수 있다는 자격을 받기 위함이랄까? 허가를 받고 구단과 함께 일정을 조정하면 만사 OK. 준비는 끝난 셈이다.

공교롭게도 대전에 도착했을 때, 도와주기로 했던 대전 정재선 주무는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전날(16일) 지인들과 저녁 식사를 하다 식당 종업원이 왼쪽 발목에 뜨거운 뚝배기 그릇을 쏟아버려 입원한 탓이다. 심한 2도 화상을 입었다는데 조금은 걱정스러웠지만 어쩌랴, 일단 맡은 임무에 충실해야 했다. 대신 김광수 2군 주무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대전 김광식 사장은 “타이밍도 절묘하지. 어떻게 정 주무가 다친 걸 알고 대타로 왔는지. 여하튼 잘해봅시다”라고 부담 반, 걱정 반의 농담을 던졌다.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었나. ‘1일 주무’의 ‘사수’가 된 김 주무가 곁으로 다가와 결재서류를 넘겨주더니 한 마디 했다. “여기에, 감독님 사인 받아야 하니까 선수단 숙소로 함께 가시지요.” 시계를 보니 정오가 갓 지났다. 킥오프 타임이 오후 3시니까 대략 세 시간 전부터 임무가 시작된 셈이다.

대전 숙소는 사무국에서 차량으로 약 15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논과 밭, 푸른 산이 보이는 풍경이 영락없는 시골의 모습이다. 대전 선수들이 “밤에 보면 도깨비 집처럼 느껴진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숙소 주변은 황량했다. 김 주무가 말했다. “저희 임무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해요. 명단을 넘겨받고, 사인을 받은 뒤 경기 준비를 하죠.” 통상 R리그 벤치는 감독보다 코치가 이끄는 경우가 많다. 대전 노경환 코치로부터 사인을 받고, 감독실 문을 노크하자 귀에 익은 목소리. “왔나? 오늘 못하면 알제?” ‘왕쌤’ 왕선재 감독이다.

○“저희요? 살림꾼이죠. 그래도 꼭 필요한….”

장비 담당도 이날 체험의 일부분이었다. 선수단 드레싱 룸에 들어가 관물대를 보니, 선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 2벌과 트레이닝복 한 벌씩 걸려 있다. 총각들이 우글대는 곳이 그렇듯, 쾌적하진 않았다. 그러나 깨끗하게 세탁하고 탈취제까지 뿌린 유니폼들로 향긋한 냄새가 난다. 때마침 들어오던 선수 몇몇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본 뒤 김 주무에게 다가간다. “저 사람, 누구에요?” 체험 취재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랬다. 이런 상황이 익숙치 않았던 것. 퉁명스런 모습에 실망하긴 했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아직 시간은 많다.

유니폼 수량을 체크하며 살펴보니 스타킹도 각자 취향대로다. 스타킹 밑창이 닿는 느낌이 싫다는 선수들을 위해 발목이 없는 스타킹도 있었고, 손을 다친 골키퍼를 위한 장갑 몇몇은 손가락 2-3개가 함께 묶인 경우가 있었다. 이런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게 장비 담당관의 역할. 축구화는 선수들이 각자 관리한다. 김 주무에게 물었다. “진짜 역할이 대체 무엇이냐”고. 돌아온 대답. “살림꾼이죠. 때론 세탁소 직원이 되고요. 하지만 꼭 필요한 역할입니다. 코칭스태프가 ‘아빠’라면 주무는 ‘엄마’에요.”

숙소 내 볼일을 마치고 경기장 세팅을 위해 보조구장으로 이동했다. 할 일이 많다. 라인이 제대로 그어져 있는지 확인하고, 교체판과 들 것, 감독관 석을 정리해야 한다. 골대에 그물망을 설치하고, 코너 플랙을 박아 넣는 것도 마찬가지. 연습구에 공기를 채우는 것도 주무가 할 일이다. 지정병원 혜창 정형외과에 연락해 앰뷸런스를 부르고, 볼 보이를 수행할 유성중학교 축구부 학생들을 불러 임무를 숙지시켜야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골 망을 설치하고 코너 플랙에 말뚝을 박고 나니 하늘이 노랗다. 평소 주무 홀로 한다는데. 만만치 않다. 온도계를 보니 섭씨31도. 벌써 지친다.

○음료 서빙부터 교체, 기록지 발송까지

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필드로 나온다. 깨끗이 세탁된 복장을 보니 마음까지 가볍다. 하지만 여유는 없다. 심판진과 감독관에 시원한 음료를 배달해야 한다.

출전 명단을 감독관과 양 팀에 전달하는 일도 해야 한다. 정오부터 킥오프 10여 분 전까지, 정신없이 쏟아지는 역할에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하다. 이럴 땐 머리털을 뽑아 여러 분신을 만드는 손오공이 부럽다.

김 주무의 잔소리는 끝이 없다. “빨리 심판실으로 가 경기 시간이 됐다고 말해주세요. 참, 선수들이 입장 대기하도록 도와주시고요. 또 선수들에게 불필요한 장비가 있는지 확인해야 해요.” 일단 경기가 시작되면 주무는 짧은 휴식을 취할 수 있다. R리그는 승패보다 선수들의 기량 확인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 여유 있게 관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필드 위 선수들은 그렇지 않지만. 염두에 둘 부분도 있다. 교체 수 제한이 없어 출전 명단에 오른 선수 전원이 고른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 따라서 주무는 감독의 교체 지시가 떨어지면 곧장 교체 용지에 이름과 배번을 적어 대기심에 제출해야 한다.

이날 경기는 이제규와 곽철호가 한 골씩 넣은 대전이 광주를 2-1로 꺾었다. 3연승. 주무 데뷔전 치곤 흡족한 결과이다.

노 코치가 악수를 건넨다. “첫 경험인데 어땠어요? 앞으로 알바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승리의 기쁨 때문이었을까. 딱딱하게 굳었던 선수들의 표정도 웃음이 가득하다. “형, 아까는 죄송했어요. 누군지 잘 몰라서.” 짧은 만남과 짧은 교감. 그들의 모든 것을 알기에 시간은 부족했어도 진짜 체험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 한 가지 더. 내가 가진 또 다른 적성을 알 수 있었고.

대전 |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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