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가 역사적 사실을 그리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단순한 사실을 담아내기 위한 고증의 차원을 넘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 하는 시각의 문제가 늘 논란의 대상이 되는 마당에 드라마와 영화 역시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한국 드라마사에는 역사와 그 속을 온몸으로 통과한 이들의 이야기를 그리며 역사적 사실을 그나마 온전히 담아내면서도 논란을 피하려 하지 않았던, 그래서 더욱 호평 받은 작품도 적지 않다.
1991년 오늘 방송을 시작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사진)’도 그런 작품이다. 김성종 작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는 이날부터 1992년 2월6일까지 방송되며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송지나 작가의 대본과 김종학 PD의 연출력, 주인공 채시라와 최재성, 박상원, 고현정 등 연기자들의 열연, 연 인원 3만여명의 제작진의 노력이 한데 어우러져 평균 시청률 44.3%를 기록했다. 최고 시청률은 58.4%에 달했다.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강점기부터 6·25 전쟁까지 험난했던 현대사를 배경으로 최대치(최재성), 윤여옥(채시라), 장하림(박상원) 등 세 남녀의 이야기를 그렸다. 일제 징병과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주인공들이 온갖 죽음의 고비를 넘긴 끝에 해방을 맞지만 좌우익 대립과 전쟁 등 혼돈스럽고도 비극적인 상황에 빠져들며 또 다시 처절한 운명 앞에 놓이는 이야기는 국내는 물론 중국과 필리핀 등을 오가며 진행한 광대한 로케이션을 통해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그려내면서 그 아픔을 되새기게 했다. 또 제주 4·3 사건을 드라마 사상 처음으로 다루면서 또 다른 화제와 함께 비교적 세밀한 묘사를 통해 현대사의 또 다른 비극을 전면에 드러냈다. 극중 채시라와 최재성의 ‘철조망 키스신’은 이 드라마가 대중적으로 남긴 또 하나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하지만 드라마는 최재성이 뱀을 뜯어먹는 장면을 비롯한 일부 잔혹한 표현 등은 방송 내내 논란을 모았다. 방송위원회의 제재조치가 이어지기도 했다.
대작드라마로서 그 진면목을 과시한 ‘여명의 눈동자’는 김종학 PD와 송지나 작가 콤비가 역량을 크게 발휘한 작품이다. 두 사람은 1995년 SBS ‘모래시계’로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명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김종학 PD는 2013년 7월 자신의 작품들만 남기고는 세상과 이별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