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인터뷰]‘뿌리’찾는입양기타리스트드니성호얀센스

입력 2009-05-08 16: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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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씨는 삶의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친부모를 찾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에 와서 찾아보고, 겪어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성호 씨가 그토록 열렬히 원하는 것. 그는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그것을 ‘뿌리’라고 말했다.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입양기타리스트 드니성호.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입양기타리스트 드니성호.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동네 기타학원 선생이 말했다. “사람에겐 두 가지 슬픔이 있지. 처절한 슬픔과 애절한 슬픔. 인간의 비통하고 처절한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악기는 바이올린이라고 해. 하지만 눈물이 맺힐 듯 말 듯 애절한 슬픔은 세상에 기타를 따라올 악기가 없지.” 그 말이 뭔지 모르게 빡빡머리 중학생의 가슴에 뜨겁게 닿았다. 그날따라 손가락 부어터지는 줄도 모르고 연습을 했던 것 같다. 그래봐야 그날의 연습곡은 ‘애절한 슬픔’과는 별 연관이 없어 보이는 샌드 페블스의 ‘나 어떡해’였지만. 드니 성호 얀센스라는 이름의 기타리스트가 있다. 한국계 벨기에인이다. 가운데 ‘성호’라는 이름이 그가 한국계임을 드러내는 유일한 열쇠이다. 성호씨는 197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에게는 부모가 없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그는 부산시청 앞에 버려졌다. 이후 고아원에 보내졌고, 생후 9개월 만에 ‘좋아하는 것은 우유이며, 그 밖에 신체적 특성은 없다’라는 서류 한 장과 함께 포대기에 싸여 벨기에로 입양되었다. 2006년 성호 씨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것은 자신의 ‘뿌리(그는 이 발음을 정확히 할 수 있었다)’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가 가진 단서는 자신의 이름이 ‘신성호’이며, 자신이 머물렀던 고아원의 장소가 전부였다. 물론 아직까지 친부모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 성호 씨는 한국과 벨기에를 오가며 살고 있다. 3년이란 세월은 그를 변화시켰다. 그는 더 이상 부산을 찾지 않는다. 대신 기타를 들고 모국의 음악팬들을 위해 연주한다. 자신을 버렸던,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토록 만나고 싶은 친부모가 자신의 연주를 듣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의 손가락을 통해 울려 퍼지는 6현 나일론 줄의 소리는 그의 ‘사모가(思母哥)’다. 그 옛날 기타선생이 말했던 애절한 슬픔이다. 공연을 앞두고 다시 한국을 찾은 성호 씨를 동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한국말이 서툰 그와 영어로 인터뷰를 했다. “2006년에 처음 왔고, 그 후 매년 한 번씩은 왔어요. 이번이 네 번째가 되겠군요.” -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요? “이화여대 어학당에 다니고 있습니다. 완전 초보라 첫 단계부터 시작했는데 지금 두 번째 레벨입니다. 공연을 앞두고 수업을 많이 빼먹어서 이번 레벨 테스트에서는 떨어질 거 같아요(그가 웃으며 한국말로 ‘바빠요’라고 말했다). 가장 괴로운 건 내가 한국말을 하면 아무도 이해 못한다는 겁니다. 하하!” - 왜 애써 한국말을 배우려고 합니까? “한국을 좀 더 깊게 ‘디스커버리(발견)’하고 싶어서요. 한국말을 모르면 나는 늘 아웃사이더일 뿐이니까. 인사이더가 되고 싶으니까요.” 성호 씨는 8살 때에 처음 기타를 손에 쥐었다. 원래는 피아노가 치고 싶었다. 하지만 양부모는 성호 씨에게 피아노를 사줄 만큼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벨기에 수도인 브뤼셀에서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마을인지라 주변에 마땅히 피아노를 배울 만한 곳도 없었다. 전직 체육교사였던 양아버지 피에르 얀센스(67) 씨와 어머니 이베트 얀센스(66) 씨는 어린 아들에게 피아노 대신 클래식 기타를 사다 주었다. 장난감 같은 아이용 기타였고, 싸구려였다. 동네 스페인 청년에게 ‘도레미파~’를 배우던 아이는 이제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인정받는 음악가가 됐다. 14세 때 벨기에 콩쿠르 영재부문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2004년에는 유럽 콘서트홀연맹으로부터 ‘라이징스타’로 선정돼 뉴욕 카네기홀, 빈 무지크페어라인,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등에서 독주회를 갖기도 했다. 파리고등사범음악원과 벨기에 왕립음악원을 졸업했고, 브라질 출신의 형제 기타 거장 세르지우 아사드와 오다이르 아사드를 사사했다. - 언제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나요?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얼굴 생김새부터가 달랐으니까요. 사춘기 때 방황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나는 한국인일 수도 있고, 유럽인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어느 쪽에 내 자신이 속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둘 사이의 밸런스를 어떻게 하면 잘 유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요.” - 친부모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원망보다는 슬픔을 느낄 뿐이지요. 생모도 일평생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겠습니까. 사실 싱글맘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가 더 크지요. 친부모를 보게 된다 해도 용서하고 화해하고 싶을 뿐입니다. 친모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 ‘어렸을 때 버려진 자는 평생을 전투하듯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지요?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면 뇌에 상처가 생깁니다. (자신의 손에 난 꿰맨 상처를 가리키며) 정신적 외상이라고 해야 할지. 의학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이지요. 버림받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전투를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혹독한 자연환경과 싸워야 하고, 고아원에서는 새로운 사회 속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입양이 되어서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또 싸워야 하지요. 인생이 ‘파이팅’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 어려서 양부모에게 ‘사랑받아야겠다’하고 의식을 했나요?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그래서 유독 슬펐구나’, ‘그건 이런 것이었구나’하고 깨닫게 된 것들이 있지요.” - 친부모와의 만남이 어쩌면 서로의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요? “인간은 누구나 아픔과 슬픔, 고난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분들도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겠지요. 우린 서로 가족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들에게 한 명의 외국인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싱글맘에 대한 한국사회의 시선도 이해합니다. 앞에 나서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과거를 오픈하고 서로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친부모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습니까? “만약 부모를 만나게 된다면… ‘이츠 오케이’, ‘모두가 다 과거일 뿐이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냥 같이 식사하고, 술도 한 잔 따라드리고.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고 싶습니다.” 사진촬영을 위해 기타를 꺼내 든 성호 씨는 인터뷰 때와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거칠면서도, 때때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우아했다. 배경음악으로 그의 음반을 틀자 그가 곧바로 기타를 들어 따라 쳐 보였다. 두 명의 드니성호얀센스가 거울을 마주본 듯 연주를 하고 있었다. 미묘한 느낌이었다. 성호 씨는 친부모를 만날 수 있다면, 그리고 화해할 수 있다면 그들을 위해 연주를 들려주고 싶다. ‘무슨 곡을 연주할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글쎄요. 하나 작곡을 해 볼까요? 예를 들어 ‘같이 식사나 해요’ 정도의 제목으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고, 나이가 든다면.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를 입양할 수 있게 될까. “아니오. 나는 충분히 입양아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아픔을 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습니다. 보통사람은 입양할 수 있지만, 입양된 사람은 입양을 하기 어렵습니다. 많이 어렵지요.” 아픔은 아픔이 보듬는다. 그리고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가장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머리를 젓는 성호 씨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그가 다시 기타를 들고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기타만이 표현할 수 있다는 ‘애절한 슬픔’. 그는 웃고 있지만, 기타는 울고 있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사진=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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