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대표팀 안정환(오른쪽)이 2002년 한일월드컵 16강 이탈리아와의 연장전에서 헤딩 결승골을 넣고 있다. 한국은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스포츠동아DB
미국, 아마추어 수준인 1950년 최강 잉글랜드 격파
튀니지·모로코·카메룬 등 ‘검은 돌풍’은 이변 단골
이변이 있기에 월드컵이 즐겁다.
1930년 우루과이 대회부터 2006년 독일 대회까지 18차례 월드컵이 벌어지는 동안 늘 예상치 못한 이변이 나와 축구 팬들을 열광시켰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밀리는 약체 팀은 ‘축구공은 둥글다’는 격언을 마음속에 새긴 채 ‘이변의 주인공’을 꿈꾼다. 강팀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변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월드컵 이변의 역사를 살펴본다.
○악연의 잉글랜드와 미국
잉글랜드와 미국의 대결이 첫 손에 꼽힌다.
축구는 미국을 식민 지배한 영국이 종주국이다. 영국은 식민지 곳곳에 축구 문화를 심기 위해 선교사와 현지파견 관리들을 동원했다. 그러나 독립정신으로 똘똘 뭉친 미국인들은 의도적으로 축구를 멀리하고 자신들만의 게임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미식축구가 탄생했다.
그러나 일천한 역사를 가진 미국 축구가 월드컵 상대 전적에서만큼은 종주국 잉글랜드보다 우위에 있다.
1950브라질월드컵에서 아마추어 수준의 미국은 당시 세계최강 잉글랜드를 1-0으로 눌렀다. 결과를 믿지 못한 영국언론들이 잉글랜드 10:0 미국으로 오보를 냈다는 웃지 못 할 일화도 전해진다. 잉글랜드는 이후 1953, 1959, 1964, 1985년 등 네 차례 친선경기에서 미국을 6-3, 8-1, 10-0, 5-0으로 연달아 대파하며 분풀이했지만 정작 본선 패배의 앙금은 씻어내지 못했다.
두 팀은 이번 남아공월드컵에서 C조에 함께 속해 60년 만에 본선 맞대결이 성사됐다. 잉글랜드는 이를 갈고 있겠지만 결과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검은 돌풍의 시작
월드컵 이변의 중심에는 늘 아프리카 대륙이 있었다.
아프리카가 처음 월드컵 무대를 밟은 건 1974서독월드컵. 당시 자이레(현 콩고)는 유고슬라비아에 0-9로 패하는 등 3전 전패 무득점 14실점의 처참한 기록을 안고 귀국해야 했다.
그러나 이후 아프리카는 무섭게 발전하기 시작한다.
1978아르헨티나월드컵에서 튀니지가 멕시코를 3-1로 격파했고 1982스페인 대회에서는 알제리가 서독을 2-1로 눌렀다. 모로코는 1986멕시코월드컵에서 강호 포르투갈을 꺾으며 잉글랜드를 제치고 조 1위로 16강 티켓을 거머쥐었다. 아프리카 최초의 16강 진출이었다.
하이라이트는 1990이탈리아월드컵에 출전한 카메룬이 장식했다. 카메룬은 전 대회 우승국 아르헨티나와의 개막전에서 1-0으로 승리하는 최대 파란을 일으켰다.
○남북한, 36년 시차 두고 재현된 기적
남아공월드컵에서 44년 만에 나란히 동반 진출에 성공한 한국과 북한도 기분 좋은 이변의 추억을 갖고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변의 희생양은 모두 이탈리아였다. 북한이 먼저였다.
1966잉글랜드월드컵 조별리그 소련과 첫 경기에서 0-3으로 패했지만 두 번째 칠레와 맞붙어 1-1로 비기며 서서히 이변의 전주를 알렸다. 그리고 이탈리아와의 운명의 3차전. 북한은 전반 42분 박두익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며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북한은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8강에 오르며 잉글랜드 전역에 아시아 축구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월드컵 본선 8강은 한국이 2002년 4강 신화를 쓰기 전까지 아시아 국가가 본선에서 거둔 최고 성적이었다.
36년 후 잉글랜드의 기적이 그대로 한반도에서 재현됐다.
2002한일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은 이탈리아에 0-1로 뒤지고 있다가 종료직전 설기현의 극적인 동점골로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연장 후반 안정환의 헤딩 골든 골이 터졌다. 붉은 악마가 내건 ‘어게인 1966’은 현실이 됐다.
남북한이 36년의 시차를 두고 이탈리아를 누른 건 전 세계가 모두 인정하는 이변 중의 이변이다. 2005년 FIFA는 100주년을 맞아 ‘월드컵 역사 11대 이변의 명승부’를 선정했는데 한국과 북한이 100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히 장식했다.
윤태석 기자 sportic@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