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그들을 말한다] NC 김광림 “35세 타격왕…비결은 두배의 땀·눈물”

입력 2012-02-0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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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함과 성실함, 철저한 자기 관리로 16년 동안 활약을 펼친 김광림 코치. 어려운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너무나 혹독하게
 야구를 했다. 은퇴 후엔 야구계를 떠나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차마 유니폼을 벗지 못하고 친정팀 두산을 거쳐 신생팀 NC의 타격코치로
 옮겼다. 창원 | 정도원 기자

꾸준함과 성실함, 철저한 자기 관리로 16년 동안 활약을 펼친 김광림 코치. 어려운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너무나 혹독하게 야구를 했다. 은퇴 후엔 야구계를 떠나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차마 유니폼을 벗지 못하고 친정팀 두산을 거쳐 신생팀 NC의 타격코치로 옮겼다. 창원 | 정도원 기자

18. NC타격코치 김광림, 나도 왕년엔 잘 나갔어!
가난 이기려고 죽기살기로 달려든 야구
최동원·선동열 펄펄날던 87년에도 3할타율
OB맨 10년째, 트레이드땐 충격이었지만…
95년 타격왕·이듬해 올스타 MVP 전화위복
16년간 땀으로 이룬 ‘생계형 야구’ 신화
이젠 후배를 위해 다시 방망이를 세웠다

○야구로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결심

김광림 코치는“중학교 1학년 때 집이 굉장히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그 때 야구를 열심히 해서 꼭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결심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술도 못한다. 유명한 막걸리대(고려대)를 나왔지만 그런 결심을 한 이후로 음주·흡연 이런 것들은 포기하고 절제했다. 아예 그쪽으로는 생각을 안 했다”고 회고했다.

김 코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겨울에도 백네트 뒤에서 나무 의자를 부숴서 불을 때면서 혼자 스윙 연습을 했다. 야구 선수로 성공한다, 그래서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이 그만큼 강했다. 이런 결심이 16년간 프로에서 뛰면서 이렇다할 부상 없이 꾸준한 활약을 한 김 광림을 낳았다.


○86년 실패의 경험이 보약, 이후 3할대 교타자로 도약

당시 대전·충청을 연고로 하던 OB에서 그를 지명했다. 입단하고 보니 외야에 박종훈·윤동균·김우열·이홍범 같은 탁월한 선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김 코치는 “끼어들기 어려운 높은 산들이었다. 나는 젊으니까 어깨하고 주력은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첫해에는 대주자나 대수비로 주로 출장했다”고 회상했다.

85년에 규정타석 미달이었지만 3할 타율을 기록했고 86년부터 출장 기회가 많아졌다. 김 코치는 “86년엔 부진했다. 의욕은 앞섰는데 기술이 부족했다. 실패의 경험을 토대로 캠프에서 열심히 보완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87년 타율 0.327∼88년 타율 0.312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 때는 최동원, 선동열 등 특급 투수들이 경쟁하던 시기였다. 영화 ‘퍼펙트 게임’의 배경이 되었던 때이기도 하다. 이런 투수들을 상대하며 김광림은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김 코치는 “선동열 감독은 고려대 후배라 대학 때 상대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야구는 멘탈 스포츠다. 선 감독은 정신적으로 상대하기가 편했다. 타석에서 공이 크게 보였다. 최동원 선배 공은 어떻게 보면 당시 나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대각선으로 꽂히는 공이 치기 어려웠는데, 최 선배 승부구가 대각선으로 떨어지는 드롭커브였다. 그 공이 그렇게 까다로웠다”고 했다.


○트레이드, “오늘이 만우절?”

꾸준했던 김 코치의 선수 경력이 크게 요동친 해는 93년. “프로 10년차가 되는 해였다. ‘꼭 3할 복귀를 해야겠다. 80년대 잘 나가던 때처럼 다시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캠프에서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 불려가 트레이드 이야기를 들었다. 11월인데도 아내한테 ‘혹시 오늘이 만우절 아니냐’고 물어봤을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고 돌이켰다. 김 코치는 “쌍방울이 홈으로 쓰는 전주가 당시 가장 낙후된 구장이었다. 원정 가서도 ‘어떻게 여기서 야구를 하나. 여기서 할 정도면 야구 안 하겠다’고 혼자 생각했었는데 내가 바로 거기로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맥이 쭉 빠졌다”고 했다.

그런데 ‘인생사 새옹지마’일까. 쌍방울로 이적한 후인 95년, 35세의 나이로 타격왕을 했다. 한일슈퍼게임에 나가 한국측 MVP가 됐고, 이듬해엔 미스터 올스타(MVP)가 됐다. “쌍방울이 오히려 나를 야구 선수로 크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다. 쌍방울에서 좋은 일이 많았다”며 김 코치도 빙긋 웃었다.


○젊은 선수들과의 경쟁 의식하지 않고 95년 타격왕 차지

이적 첫해인 94년엔 부진했다. 타격 코치와 마찰이 있었다. 김 코치는 “95년에 다행히 김우열 선배가 코치로 오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편안하게 내 스타일로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는 혜성처럼 등장한 양준혁과 이종범에, 장종훈·이정훈 등이 함께 경쟁하고 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김 코치는 “젊은 선수들과의 경쟁을 의식하지 않았다. 4월에 홈런을 5개 쳤다. 4월 5관왕이었는데 ‘이런 것들은 내 타이틀이 아니다. 타율쪽으로만 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했다. 선택과 집중 때문이었을까. 김광림은 95년 0.337의 타율로 쟁쟁한 후배들을 제치고 타격왕에 올랐다.


○한일슈퍼게임의 교훈 - 상대 투수 파악이 가장 중요

95년 한일슈퍼게임의 대표팀에 선정돼 현해탄을 건넜다. 한국의 수위타자로서 뭔가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 코치는 “가만 보니 일본은 투수가 잘하건 못하건 3이닝이면 바뀌었다. 그래서 벤치에서 계산해보니 지금 던지는 투수는 나하고 싸울 투수가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면 분석을 할 이유가 없었다. 김 코치는 불펜에서 몸을 푸는 투수에 주목했다. 불펜 투수의 구종을 파악하고 타이밍도 마음속으로 맞춰봤다. 여섯 경기 동안 그걸 반복한 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고, 한국측 MVP로 선정됐다.

“정말 중요한 경험이었다. 코치하면서 선수들에게 계속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기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타석에서 완벽하게 자신감을 갖고 싸우려면 상대 투수를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홈런 치고 연거푸 도루, 미스터 올스타 등극

96년 올스타전에 출전해서 MVP가 됐다. 김 코치는 “정민태가 치기 좋은 공을 주는 투수가 절대 아닌데 볼카운트 2-2로 몰린 상황에서 몸쪽 낮게 떨어지는 변화구를 던졌다. 그걸 때린 게 홈런이 됐다”고 회상했다. 이렇게 되자 상품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MVP가 되기 위해선 뭔가 득점으로 연결되는 활약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사구로 출루해서 2∼3루를 연거푸 훔쳤다. “마치 꿈같이 미스터 올스타가 됐다”는 김 코치는 상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산타모라고 그 해 새로 개발된 신차였지!”


○나를 힘들게 한 야구계 떠나겠다는 생각을 바꾼 이유

이종욱·김현수를 육성한 명코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김 코치는 애초엔 지도자를 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OB 시절 주장을 하고 여러 선수들의 장단점이 슬슬 눈에 들어올 때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야구 선수로 돈을 많이 벌어 은퇴하면 야구계를 떠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왜냐면 내가 선수 때 야구를 즐기면서 하질 못했다. 체격이 작기 때문에 나보다 덩치가 큰 선수들 사이에서 성공하려면 배로 훈련을 해야 했다. 스스로를 아주 혹독하게 다뤘다. 더블헤더를 하고 파김치가 되어서도 개인훈련을 빼놓지 않았다. 워낙 야구를 힘들게 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김 코치는 “97∼98년 들어서면서 ‘이제는 정말 몇 년 안 있으면 은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유니폼 없이 살 수 있을까…”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스스로 물어도 눈물이 맺히는 듯 했다. 눈물을 훔치며 “마음을 바꿨다. 후배들이 야구를 잘할 수 있게끔 서포터 역할을 해보자고 생각하고 야구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결국 계속 유니폼을 입고 현장을 누비고 있는 김 코치는 자신의 선수 생활에 대해 “나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내가 후회 없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선수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건 당당하다”고 강조했다.

NC 김광림(51) 타격코치는 84년 OB에서 데뷔했다. OB에서 10년을 뛰며 꾸준한 활약을 하다 돌연 쌍방울로 트레이드 됐다. 정신적 충격이 컸다. 그러나 이후 95년 타격왕, 한일슈퍼게임 한국측 MVP, 96년 올스타 MVP 등 좋은 일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99년 은퇴할 때까지 16년 동안 뛰며 당시 통산 최다출장 기록(1630경기)을 세웠다. 꾸준한 자기 관리와 성실의 상징이다. KBO 심판위원장을 지낸 김광철 심판학교장은 “맞히는데 재주가 있는 선수였는데, 장효조처럼 타고난 배트 스피드가 빠른 천재형의 선수는 아니었다. 고지식하다 싶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하는 선수”였다고 평했다. 애리조나로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 창원시 마산종합운동장에서 김광림 타격코치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광림 코치는?

▲생년월일=1961년 3월 9일 ▲출신교=자양초∼공주중∼공주고∼고려대 ▲키·몸무게=173cm·78kg(좌투좌타) ▲프로 경력=1984 OB 입단∼1994 쌍방울 이적∼1997 현대 이적∼1999 쌍방울 이적·은퇴∼2004 두산 코치∼2012 NC 코치 ▲통산 성적=1630경기, 타율 0.285, 1358안타, 35홈런, 431타점, 619득점, 170도루 ▲수상 경력=1993 골든글러브, 1995 타격왕·골든글러브·한일슈퍼게임 한국측 MVP, 1996 올스타 MVP

창원 | 정도원 기자 united9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united97in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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