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자의 인증샷] ‘백야’ 이정열 “악역전문? 나 김좌진이야”

입력 2012-02-23 15:17: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배우 이정열. 사진제공|신시컴퍼니·이정열

- ‘넥스트투노멀’에 이어 ‘백야’에서 악역 이미지 벗어
- ‘그대 고운 내 사랑’의 가수, 배우된 사연
- 김좌진 장군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겠다

배우 이정열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2년 전인 2010년 5월이었다. 뮤지컬배우들이 모여 가요 리메이크 음반을 냈다며 제작사 대표가 광화문으로 찾아 왔는데, 그가 이정열 배우를 대동하고 온 것이었다.

첫 인상은, 이제 와서 말이지만 조금 무서웠다. 가만히 있을 땐 그나마 괜찮지만, 뭔가 수가 틀리면 ‘욱'하는 성격이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기자의 학창시절에 툭하면 친구들에게 돈을 뜯고 주먹질을 하던 녀석과 인상이 닮아 보여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트라우마는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차츰 이 사람의 웃는 모습이 좋아졌다. 웃을 때마다 눈가에 굵은 주름이 잡혔는데, 이럴 땐 꽤 호감이 가는 얼굴로 변했다.

이날은 이렇게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헤어졌는데, 물론 우리 세 사람 모두 이것이 질긴 인연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았다면, 틀림없이 커피 대신 생맥주라도 한 잔 걸쳤을 것이다.

이정열 배우는 이후 무대에서, 사적인 자리에서 꽤 많이 만났다. 알고 보니 기자와 나이와 학번이 같았다. 설상가상 우리는 대학 동창이었던 것이다!

이날 음반 제작사 대표로 함께 했던 사람은 현재 ‘이석준의 이야기쇼' CP를 맡고 있는 박상욱 대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 되는 일과는 담을 쌓은 양반이다.

그나저나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 한성대 입구역 근처 카페에서 이정열 배우와 기자는 멀뚱멀뚱 어색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이정열 배우가 한 마디 했다.
“내 참, 우리 사이에 인터뷰는 무슨 인터뷰예요. 만날 보면서.”
“그러게요. 그래도 할 건 해야 하니. 후닥닥 해치웁시다.”

이정열 배우가 테이블 위에 놓아둔 보이스레코더를 들더니 “아아아.. 마이크 테스트"하고 장난을 친다.
다 알고 있어요. 어색해서 그러는 거.

이정열 배우는 요즘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음악극 ‘백야'에 출연하고 있다. 무려 주인공인 김좌진 장군 역이다. 청산리대첩의 주인공이자 김두한씨의 아버지인 바로 그 김좌진 장군이다.

‘백야'는 ‘화이트 나이트'가 아니고, 김좌진 장군의 호이다.
이 인터뷰는 ‘백야'의 공연이 시작되기 전, 연습 기간 중에 이루어졌다.

- 평소에 김좌진 장군을 흠모했나.
“솔직히.. 공연의 홍보를 위해서라면 “평소 김좌진 장군에 대한 뜨거운 연모를 갖고 있었다"라고 해야 하겠으나 그렇진 않다. 다만 그 시대에 대한 존경과 흠모는 있다.

1900년대 초반은 우리 민족사에 가장 큰 격동기가 아니었나. 근현대사 시기의 자료들이 많이 공개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너무나 격변시기였기 때문에, 묻어두는 것이 좀 더 편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이 있을 것이다. 흔히들 ‘진실은 불편하다'라고 하지 않나.

엄청나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인사동, 낙원동에서 마주치는 할아버지들의 어린 시절이다. 대단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스펙터클한 사건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 시대, 한 남자로서 흠모와 동경은 늘 갖고 있다.”

- 뮤지컬 ‘영웅'의 안중근에 이어 김좌진 장군이 등장했다. 안중근이 극중에서 ‘동양평화'를 그토록 애타게 설파했다면, 김좌진 장군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까.
“연출자나 극본을 쓰는 분이 배우의 몸을 빌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하는 중이다. 그런데 너무 사료가 없다. 오히려 나폴레옹, 칭기즈칸, 잔다르크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많은데.

우리가 알고 있는 청산리전투는 불과 29세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마흔에 암상을 당해 돌아가셨다. 조금 더 알아보면 후대가 하나의 위인이라는 틀로 보기에는 섭섭하고 아쉬운 부분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암살은 정적이 있어서 제거하고자 한 것이고.
무엇이든지 흠결이랄지, 그 시대에 맞지 아니한 것도 있을지 모른다.

그건 그렇고 극 중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홍성을 떠나 서울에서 암약하다가 만주로 갔던 김좌진이 홍성에 불현듯 돌아온다. 그때 청년 김좌진의 선생(멘토 역할이다)이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라고 묻자 김좌진은 “군대를 만들어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놀랍지 않나. ‘군대'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 당시 정세를 바라보는 각도가 달랐다는 얘기다. “이것이 전쟁이라면, 누군가는 그래야하지 않겠소"라는 대사도 나온다.
강압에 대한 반작용은 비폭력 평화주의여야 한다는 모델에서 다른 시각을 보여준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 인터뷰가 상당히 딱딱해지고 있다. 분위기를 바꿔보겠다. 그 동안 악역을 많이 맡았다. 하지만 최근 ‘넥스트 투 노멀'에서 인내심 많은 아빠 ‘댄'을 했고, 이번엔 장군님으로 승격했다. ‘우주 최고의 악역전문배우'라는 별명은 폐기처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별명 양기자가 지은 거 다 알고 있다. 우선!! 정정할 부분이 있다. 모든 배역에 악역이란 것은 없다. 캐릭터가 강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연을 많이 보신 분은 이해하실 텐데... 뮤지컬 배우들은 대체적으로 성악발성을 베이스로 하는 사람이 많다. 다른 차원의 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심지어는 긁는 소리를 내게 되면 목이 상했다고 하기도 한다.
록적인 보컬발성이나 허스키 소리를 내는 배우는 매우 드물다.

무대극에서 선한 캐릭터가 있으면, 상대가 있어야 그 선이 살지 않겠나. 악한 캐릭터의 목소리가 성악 발성을 하고 있으면 얼마나 웃기겠나.
나로서는 록을 하면서 얻은 허스키 사운드가 있고, 필요할 때 그걸 꺼내 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강한 캐릭터가 많이 들어온 거고.”

- 원래 가수였다. 뮤지컬은 어떻게 해서 하게 됐나.
“상당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이정열 배우의 ‘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어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1988년에 형이 죽고, 그 해 겨울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정열은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대학을 휴학한 상태였는데, 휴학을 하니 득달같이 군대영장이 나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정열은 한달 가까이 술만 마셨다. 학과니 동아리니 선배들은 슬픔을 안고 군대를 가는 후배 이정열에게 연일 위로의 송별주를 샀다.

이정열은 선후배들에게 손을 흔들고 고향 온양으로 내려갔다.
“지금은 아산시로 통합이 되었지만, 그래도 작죠. 4~5월 날씨 좋은 날 외출해서 처음 만난 사람을 집에 갈 때까지 네 번은 만날 정도로 작죠. 동네가 혜화동 로터리만 해요. 게다가 거기서 나고 자랐으니. 학교가 많은 것도 아니고.”

이정열은 ‘혜화동 로터리만한' 동네에 슬렁슬렁 바람 쐬러 나갔다가 시청 근처에서 아는 형을 만났다. 형이 “오랜만인데 커피나 한 잔 하자"며 이정열의 손을 잡아끌었다.

배우 이정열.사진제공|신시컴퍼니·이정열



“너 서울에서 뭐 하러 내려왔냐?”
“영장이 나왔어요. 군대 가려고요.”
“너 아버지 돌아가신지 얼마 안됐잖아.”
“네.”
“형도 죽고, 동생은 중1이잖아.”
“그렇죠.”
“어머니도 편찮으시지?”
“시골 엄마들 다 아프시죠 뭐.”
“너 이거 작성해라.”

우연히 만난 동네 형이 웬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작성을 하고 나니 일주일쯤 뒤 실사단이 나왔다. 서류내용이 사실과 같은지 확인하러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정열은 군 입대 일주일을 남겨두고 면제를 받게 됐다.

이정열은 어머니를 설득했다. 군대를 안 가게 되어 2~3년이란 시간을 벌게 되었으니 “군대간 셈치고 2~3년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서울로 올라온 이정열은 학교 선배들의 추천으로 포크모임에 가입을 하게 되고, 인정을 받아 정식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솔로음반 2집에 담긴 ‘그대 고운 내 사랑'은 가수 이정열의 최대 히트곡이다.

가수로 데뷔한 이정열은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문호근 선생의 눈에 들어 1994년 가극 ‘금강'으로 무대에 서게 된다. ‘금강'은 신동엽 시인의 작품을 가극으로 만든 작품인데, 정통 성악을 공부한 오페라 가수들 사이에서 대중가수 이정열은 매우 튀는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문호근 선생님께서 저를 예쁘게 보셨나 봐요.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때 나 이뻤다니까. 비디오형 가수였어요. 내가 무대에 서면 사람들이 노래 안 들었어요. ‘와~ 이쁘다'했지. 뮤지컬이 내 얼굴 망가뜨린 거예요. 이건 꼭 좀 써주세요.”

‘금강'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정열은 ‘아침이슬'의 작곡가이자 가수, 뮤지컬제작자인 김민기의 눈에 들어 뮤지컬 ‘개똥이'에 캐스팅된다. 1995년의 일이다.

“‘노래마을’에 있다가 자리를 옮겨 합류한 곳이 지금의 다음기획이었어요. 그때는 한빛기획이었죠. 정확히는 노찾사기획이고. 여하튼 이곳에서 정태춘, 권진원... 신인으로는 이정열. 이렇게 세 명의 음반을 진행하게 됩니다. 회사는 달랐지만 당시 오디션을 보러 온 친구가 윤도현이었고요.”

김민기의 ‘학전'이 야심차게 제작한 ‘개똥이'에 이정열과 윤도현이 나란히 캐스팅된다. 윤도현은 반딧불이 ‘개똥이', 이정열은 ‘개똥이'를 보호해주는 쇠똥구리 할아버지 역이었다. “아동극이 아니냐"고 물으니 이정열은 “아이들 극같지만 범우주적인, 심오함이 있다"고 했다.

- 얘기가 정말 길어졌다.
“사실 나도 왜 배우가 됐는지 모르겠다. 배우수업을 받아본 적도 없다. 다만 한 가지. 소리공부할 때 좋은 소리가 뭔지를 늘 고민했다. 수 만 명 사람이 다 다른 인생관과 목소리를 낼 텐데.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땠을가'를 상상하면서 지낸 시간이 많다. 내게는 그것이 배우수업이 아니었을까.

김민기 선생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이제서야 무릎을 치고 있다.
선생님은 슬쩍 지나가는 말씀으로 “연기하지마. 연기하지만. 제발 연기하지마"라고 하셨다.
그땐 ‘난 연기하러 왔는데 연기하지 말라니 뭔 소리인가'했다. 그 말씀은 “연기를 뭐 하러 하냐. 네가 그 사람이 되면 되는 거지"란 의미였던 것이다.

작품이 결정되고 캐릭터를 만나게 되면 내가 입어야 할 캐릭터가 어떤 사람인가를 찾아야 한다. ‘엄마는 누구였을까’, ‘학교생활은 어땠을까', ‘30년 전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배우들만이 느낄 수 있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다. 이렇게 캐릭터를 유추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뭔가가 스르륵 내 안으로 들어온다.
에스프레소 기계가 김과 함께 ¤~하고 커피를 내리듯, 그 사람이 들어온다.
일단 들어오면 그 다음부터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 알아서 움직이니까.

사실 되게 쉽다.
무대 의상을 입고, 분장을 하고, 무대 공간을 지나갈 때는 일종의 막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 막을 슉하고 통과하는 순간 이정열은 사라지고 그 사람이 등장한다. 그 다음은 그 사람이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한번 해보세요. 재밌어. 흐흐”

인터뷰를 하고 있자니 이계창 배우가 휘릭휘릭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였다. 이계창 배우는 ‘백야'에서 이정열 배우와 함께 김좌진 장군 역을 맡고 있다.

잠시 후에는 ‘한은희' 역의 선영 배우가 지나간다. ‘백야'의 오후 연습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정열 배우와도 헤어질 시간이 됐다.

“‘백야'에서는 인간적인 김좌진을 이야기할 겁니다. 꼭 보러 오세요. 그나저나 장군님 함자가 너무 어려워요. 발음이 정확해야 하는데....”

다시 한 번 공지.
이정열, 이계창이 김좌진 장군으로 출연하고 박주형(오민욱 역), 선영(한은희 역), 문종원(하세가와 대좌 역), 한성식(이치로 경시 역)이 출연하는 음악극 ‘백야'는 3월 4일까지 서울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한다.

PS. 인터뷰를 한 며칠 뒤 이정열 배우가 자신이 과거 틀림없는 ‘꽃소년 가수’였음을 입증해 보이겠다며 자료 사진을 보내왔다. 그 중 일부를 추려 게재한다.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배우 이정열(왼쪽)과 기자(오른쪽).


사진제공|신시컴퍼니·이정열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anbi361
blog.donga.com/ranbi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