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월드스타’ 손기정이 부르는 ‘발의 노래’

입력 2022-08-17 18: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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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만에 개정증보판을 낸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손기정 자서전’.

손기정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출간
“우리 육상장거리의 혜성 양정고보의 손기정 군은 21일 정오 동경에서 열린 일본 마라톤연맹 주최의 마라톤대회에서 2시간26분14초란 경이적인 세계 최고기록을 지어 우승하여 명년으로 앞둔 제11회 세계올림픽대회에 우승할 제1후보로도 엄지손을 꼽게 되어 파견이 확정적이다.” -동아일보 1935년 3월21일자 호외

그리고 다음해인 1936년 8월9일. 올림픽이 열린 베를린의 하늘은 뜨거운 태양으로 눈부시고 있었다. 섭씨 30도. 마라톤 출발선에선 손기정의 이마에도 땀이 비 오는 흘러내렸다. 오후 3시3분. 출발 총성이 울렸다. 세계 각국 56명의 선수들이 출발선을 박차고 나갔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아르헨티나의 후안 사발라(전 대회 우승자)가 1시간11분29초의 기록으로 선두를 찍었다. 하지만 오버페이스였다. 그는 결국 30km 지점서 레이스를 포기했다. 4위로 달리던 손기정이 1위로 나섰다. 골인 지점까지 그를 앞선 선수는 없었다. 모두 그의 등 뒤에서 뛰었다.

2시간29분19초2. 올림픽 최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일제강점기에 비록 일본 대표선수로 출전했지만, 조선인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선사하며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사건’이었다. 동아일보 등 신문들은 8월10일 아침 일제히 호외를 발행하며 손기정의 세계제패 소식을 알렸다.

“우리의 손기정은 이겼다! 우리의 젊은 손기정은 세계에 빛나는 승리를 얻었다. <중략> 스포츠의 승리자 손기정은 스포츠 이상의 승리자인 것을 기억하자. …조선은 손기정, 남승룡 양 군에게 불우와 불행을 주었을 뿐이로되 양 군은 그래도 조선에 바치고 갚았다. 조선의 아들들아 이 맘을 아는가!” -동아일보 사설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29분19초2의 올림픽 최고기록으로 골인하는 손기정 선수. 그는 원조 월드스포츠스타였다.


그렇다. 손기정은 한국인 최초의 세계적인 스포츠스타였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우승자’였다. 그는 왜 달렸는가. 아니 절망으로 가득한 그 시대에 왜 달릴 수밖에 없었는가.

“기쁨보다는 슬픔이, 웃음보다는 눈물이 앞섰던 시대였다. 내게 있어서나 모든 조선 민족에게 있어서나 희망보다 절망이 더 큰 시대였다. 그 절망과 혼돈의 시기에 마라톤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 내겐 오히려 고통을 잊는 유일한 길이었다.”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중에서

가슴이 아려온다. 민족의 영웅이 된 식민지의 청년 손기정의 고뇌와 투쟁. 그리고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가도 가도 끝없는 황톳길을 걸어 온 인간 손기정의 질곡의 삶. 그가 걸어온 장엄한 ‘발의 노래’에 벅찬 감동과 감격, 그리고 서글픈 눈물이 뒤범벅되어 흐른다.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손기정 자서전’(손기정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이 새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다시 섰다. 그가 월계관을 머리에 썼던 8월9일에 맞춰 출간돼 더더욱 반갑다. 이 책은 1983년 출간한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의 개정증보판이다. 39년 만에 다시 세상에 온 것이다. 손기정 선생이 2002년 서거했으니 올해로 20주기가 된다. 1912년 8월29일 신의주 태생이니 탄생 1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1948년 런던올림픽 당시 한국선수단의 입장 모습. 손기정 선생이 기수로 나섰다.


이번 책에는 손기정기념관 소장 사진 외에도 유물, 역사 사진 100여장이 추가됐다. 출판사 측에서는 “1984년 자서전 출간 이후 그리스 청동 투구 반환과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 봉송, 2002년 타계에 이르기까지 손기정 선수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의 회고를 더해 손기정의 삶을 더욱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담아냈다”고 소개했다.

“나를 기억하게 해 달라.” 손기정 선생의 마지막 유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우리는 세계적인 영웅 손기정을 얼마나 아는가. 일본에서는 ‘손기정 평전’까지 출간하며 연구를 하고 있는데 우리의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식민지 시대 청년의 정신은 아직도 유효하다. ‘나를 기억하게 해 달라’는 그의 유언은 우리를 향한 죽비소리처럼 들린다.

연제호 기자 sol@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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