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햐아! 흑이 제법 한 것 같은데, 막상 세어보니 별 게 없네?” L이 신기하다는 얼굴이다. 쉽게 갈 수 있는 바둑을 백이 실수하는 바람에 추격의 빌미를 주었고, 바둑은 거의 역전의 문턱까지 갔던 것이다. 설상가상 좌변에서 흑백 간 목숨이 달린 사활패가 걸렸다. “<해설1>은 어땠을까?” A가 주섬주섬 바둑판 위에 돌을 늘어놓았다. 흑이 <실전>처럼 패를 해소하지 않고 1로 따내는 변화이다. 백이 2로 따내면 흑은 3으로 이어야 한다. 그런데 백이 4로 △ 자리를 따내면 결국 패는 흑이 이길 수 없다. 좌변은 사실상 양패인 것이다. 게다가 백이 □ 두 곳을 얻어서는 흑은 괜히 발에 땀만 낸 셈이 된다. <실전>도 마찬가지. 하중앙에서 백이 시원하게 뻥 따낸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전> 흑9로 <해설2> 흑1로 두는 것은? “백2가 있지. 이건 <실전>에 비해 흑이 더 손해야. <실전> 흑9가 정수라고.” A가 지적했다. 바둑은 예상대로 백의 승리로 끝났다. 홍성지에겐 뼈아픈 패배다. A조 리그에서 홍성지는 이미 2승을 얻어놓은 상태였기에, 이 바둑만 이기면 3전 전승으로 결선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전 전패의 조훈현에게 발 뒤꿈치를 아프게 물리고 말았다. “하여튼 지독한 분이시라니까. 조국수님은.” L이 혀를 차더니 바둑판 위의 돌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러기에 여전히 ‘바둑호랑이’시라는 거 아니겠어? 그 분 이빨 다 빠지시려면 10년은 더 걸리려나.” A의 말에 L이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 전에 우리 발톱이 먼저 다 빠질 거다.” <280수, 백 4집반승>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해설=김영삼 8단 1974ys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