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방황끝…제2의전성기노리는김대섭“나를바꾼건42초짜리스윙동영상”

입력 2009-01-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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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듀발(미국)을 기억하는가? 1990년대 후반 타이거 우즈(미국)와 함께 미국프로골프(PGA) 투어를 양분했던 듀발은 2000년대 들어서 슬럼프에 빠지면서 우즈에게 골프황제의 자리를 내줬다. 돈을 벌만큼 벌었던 듀발은 골프를 내팽개치고 낚시와 요트에 심취하면서 나태한 생활을 즐겼다. 지겨워진 듀발은 다시 필드에 복귀를 희망했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후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스폰서의 초청을 받아 대회에 출전한 3류 선수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는 많지 않다. 2008년 가을, 뜨거운 눈물을 쏟아낸 사나이가 있었다. 듀발처럼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 남자골프의 기대주 김대섭(28·삼화저축은행)이다. 3년의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우승트로피를 품에 안은 김대섭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가슴 속 깊이 박혀 있던 응어리를 덜어냈다. ○금메달 보다 급했던 가정형편 2001년 9월 16일, 서울 인근의 한양골프장에서 열린 한국오픈 최종 4라운드에서 김대섭은 생애 두 번째 한국오픈 우승컵을 안았다. 1998년 고교 2학년 때 우승한 이후 3년 만이었다. 아마추어 선수라 상금은 타지 못했다. 한국오픈 우승 직후 김대섭은 프로로 전향했다. 당시 성균관대 2학년이던 김대섭은 2002년 부산에서 열릴 예정인 아시안게임을 1년 앞두고 전격적으로 프로 전향을 선언했다. 아마추어 골프계는 당황했다. 출전하면 금메달을 떼어 놓은 당상으로 여겼는데 돌연 프로로 전향했으니 금메달은 물 건너갔다. 비난도 거셌다. ‘명예를 버리고 돈을 택했다’며 어린 선수에게 화살을 돌렸다. 어린 마음에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김대섭에게는 금메달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내 뒷바라지를 위해 부모님께서 노점상을 했다. 떡볶이와 순대를 팔아 용돈을 주셨다. 나 때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프로에 가면 당장 돈을 벌 수 있는데 아마추어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게 부담이 됐다.” 김대섭의 고향은 제주도다. 아버지 김충남 씨는 오라골프장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그늘집에 음료수 등을 납품하는 일을 했다. 그 인연으로 골프를 배우게 됐다. 어머니 홍의숙 씨는 식당을 했다. 골프선수가 된 김대섭은 재능을 보였다. 아들에게 좀더 나은 환경에서 골프를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한 부모는 상경을 결정했다. 서울로 올라왔지만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김대섭의 사촌형이 운영하는 천호동의 상점 앞에서 노점을 하면서 뒷바라지를 이어갔다. 노점상을 하는 부모의 모습에 김대섭은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고 결국 태극마크를 반납하고 프로가 됐다. ○“여유가 생기면서 나태해졌다” 힘든 날을 뒤로 하고 프로가 된 김대섭은 뜻을 이뤘다. 2002년 데뷔 첫해 상금랭킹 2위에 오르며 1억7000여만 원의 상금을 벌었다. 2004년에는 든든한 후원사도 만났다. SK텔레콤으로부터 2년간 4억 원의 계약금을 받았다. 남자골프 정상급 대우였다. 많은 상금과 후원사로부터 계약금을 받으면서 가정형편은 나아졌다. 그런데 이후부터 일이 꼬였다. 우승권에 맴돌던 실력은 점점 떨어져 중위권에 머물렀다. 2005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 우승이 마지막이었고, 2006년부터는 예선을 통과하는 일도 버거웠다. 슬럼프에 빠진 김대섭에게 “돈맛을 본 김대섭이 변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본인도 인정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생활이 편해지면서 나태해졌다. 연습도 게을리 했고 뜻대로 되지 않으니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슬럼프가 깊어지면서 열흘 넘게 골프채를 잡지 않은 적도 있다.”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거액을 손에 쥔 김대섭은 급할 게 없었다. 주변의 얘기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슬럼프가 오랫동안 지속됐고, 소문은 눈 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고통이 깊어졌다. “돈 때문에 변했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일찍 결혼해서 더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며 아내를 험담하기도 했다. 나에 대해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그런 얘기까지 들어야 할 때는 죽고 싶었다. 정말이지 몇 번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슬럼프의 고통이 심했던 김대섭은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체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집밖에 나서는 일도 싫었다. 밖에 나가면 또 어떤 말을 할까 하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는 게 싫었다.” 2년 넘게 방황해온 김대섭에게 새롭게 마음을 잡는 계기가 생겼다. 고교 시절부터 함께 운동을 해온 친구가 2007년 겨울 함께 미국으로 동계훈련을 떠나자고 제안했다. 그곳에서 친구의 솔직한 심정을 듣게 됐다. “주변에 떠돌던 나쁜 얘기를 솔직하게 말해줬다. 친구로서 장점과 단점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해줬다. 그 얘기를 듣고 많은 걸 느꼈다. 친구의 진심어린 충고가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친구에게 고마울 뿐이다.” ○“인터넷에 떠돈 동영상이 슬럼프 탈출 계기” 마음을 다시 잡은 김대섭에게 또 한번의 운명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작년 여름 상반기 시즌을 끝내고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아내 왕윤나 씨가 인터넷을 하던 중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아내가 2004년에 촬영됐던 나의 스윙 장면을 인터넷에서 찾았다. 42초짜리 동영상이었는데 그 화면을 보고 지금의 스윙과 예전의 스윙이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됐다. 휴대폰으로 화면을 촬영했다가 연습장으로 달려가서 그대로 따라했다. 그러다보니 조금씩 전성기 때의 감각을 되찾게 됐다.”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슬럼프의 원인을 인터넷에 떠도는 동영상을 통해 알았다. 스윙의 감각도 되찾았다. 김대섭은 그때 촬영한 스윙 동영상을 휴대전화 메인 화면에 담아두고 지금도 수시로 보면서 감각을 익히고 있다. 짧은 동영상 한편으로 잃어버렸던 스윙감각을 되찾은 김대섭은 조금씩 자신감도 되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하반기 세 번째 대회인 KEB 한중투어 2차대회에서 우승의 기회가 다가왔다. 3라운드까지 2위 그룹에 5타차나 앞서 최종 4라운드를 출발했다. 모처럼 부모님과 아내도 골프장을 찾았다. 그런데 쉽게 우승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또 틀어졌다. 후배 김대현(21·하이트맥주)에게 1타차 역전을 허용했고, 최종 18번홀의 마지막 기회만을 남겨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꼭 버디를 만들어내 연장전에만 들어가자고 생각했다. 그러면 우승할 자신이 있었다.” 김대섭의 간절한 바람은 현실로 이뤄졌다. 그림 같은 어프로치 샷으로 버디 기회를 만들어내면서 연장전으로 승부를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3년간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냈다. “나중에 들으니 부모님과 아내가 경기 도중 집으로 가려고 했다가 그래도 한번 기다려보자며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는데 우승하는 장면을 보게 돼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또 울었다.” ○“다시 찾은 정상의 기쁨 오래 간직하고 싶다” 성공과 방황을 한번 씩 겪은 김대섭은 많이 어른스러워졌다. 2005년 12월 탤런트 왕빛나의 동생 왕윤나(26) 씨와 결혼한 김대섭은 오는 7월이면 두 아이의 아빠가 된다. 현재 세 살배기 아들 단을 두고 있다. “예전에는 왜 그렇게 어리석고 이기적인 생각만 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얘기하면 흘려듣기 일쑤였고 내 생각대로만 행동했다.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스스로 성숙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지금 같은 생각을 몇 년 전에는 왜 하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운 마음도 든다. 그랬더라면 좀더 일찍 슬럼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 텐데….” 프로 8년차 김대섭은 올 시즌이 끝나면 잠시 필드를 떠나게 된다. 그동안 미뤄왔던 군에 간다. “군대에 갔다 와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계획이다. 늦었지만 한두 해 골프를 쳐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다녀올 생각이다. 아마도 그때가 되면 더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한때 세계랭킹 1위까지 올랐던 데이비드 듀발은 10년이 넘게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김대섭은 3년 만에 부활에 성공했다. “다시는 이전과 같은 실패를 경험하고 싶지 않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다시 찾은 정상의 기쁨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다.” 주영로 기자 na187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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