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여주인공 윤정인.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방송리포터에서오페라의프리마돈나로’-소프라노윤정인
“정말 저를 인터뷰하러 오신 거 맞아요?”윤정인(28)씨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럴 땐 오히려 즐겁다. 인터뷰는 보이지 않는 심리전이다. 겉 물결은 잔잔하지만 수면 아래론 왕왕 격류가 휘몰아친다. 가끔은 이렇게 허를 찌르는 일이 기자에게 묘한 쾌감을 준다.
윤정인씨는 소프라노다. 24일부터 26일까지 서울시오페라단이 세종M씨어터에서 막을 올릴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여주인공인 로지나 역을 맡았다. 젊음의 불꽃같은 생기가 사방으로 튀는 배역으로 윤정인은 서활란, 강혜정 등 국내 정상급 스타들과 나란히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박세원 단장님께서 평소 젊은 관객들을 많이 오게 만들기 위해선 젊은 캐스팅이 필요하다고 하셨거든요. 그 동안 주로 소극장 오페라무대에 많이 섰는데 단장님께서 제 노래와 연기를 좋게 평가해 주신 것 같아요.”
윤정인 씨를 처음 무대에서 본 것은 작년 6월 같은 곳에서 공연한 모차르트의 ‘돈조반니’에서였다. 활기차고 애교가 넘치는, 어쩐지 무슨 짓을 해도 남자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체를리나 역을 맡아 호연했다. 당시 윤정인씨를 모르고 있던 기자는 이렇게 리뷰기사를 썼다.
<이날 공연에서 가장 돋보였던 것은 돈조반니의 ‘방자’ 레포렐로(차정철)와 체를리나(윤정인)였다. 두 사람은 밋밋해지기 쉬운 스토리 라인에 활력과 재미를 불어넣어 준 일등공신이었다. 돈조반니의 노래에 맞춰 ‘립싱크’를 하던 레포렐로와 연인 마제토에게 애교를 부리며 용서를 비는 체를리나의 모습은 잊기 어렵다>
윤정인은 정통 성악가의 길을 추구해 왔지만,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시선은 ‘정통’에 고정돼 있었지만 스텝은 다분히 ‘크로스오버’적이었다.
대학 졸업 후 윤씨는 케이블방송 아나운서와 캐스터, 지상파 방송 리포터 등을 거쳤다. 최근에는 오페라단의 홍보담당으로도 일했다. 물론 음악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서울시오페라단의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 ‘돈조반니’를 비롯해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등의 무대에 올라 성악가로서의 경력을 차곡차곡 쌓았다.
서울광장, 야외음악당, 갤러리, 하우스 콘서트 등에서는 해설자로도 인정을 받았다. 다양한 이력과 방송 경험은 장차 클래식 음악프로그램 진행자의 꿈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라 믿고 있다.
윤정인씨는 유학파가 아니다. 국내 대학과 대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졸업 후 음악활동을 계속했지만 큰 무대에 설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윤씨의 크로스오버적 행보는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생긴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길이 된다.
“오페라요? 멋진 장르죠. 음악, 극, 연출, 미술, 의상 등 모든 예술의 종합세트잖아요. 원래 좋아했어요. 친구들이 저보고 ‘오페라 홍보대사’래요. 관객들과 오페라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고 싶어요.”
오페라단에서 홍보일을 한 것도 오페라가 마냥 좋아서였다. 오페라가 만들어지고,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는지 그 ‘속살’이 궁금했다. 작년 돈조반니 때는 일과 공연을 병행했지만 이번 세빌리아 이발사에서는 배역 비중이 커 공연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소프라노는 목소리 톤에 따라 크게 콜로라투라와 리릭으로 나뉜다. 성량이 풍부하고 기교적이면서 화려한 쪽이 콜로라투라다. 조수미가 대표적이다. 반면 신영옥처럼 서정적이고 섬세한 목소리는 리릭이다. 윤씨의 목소리는 양쪽의 장점을 조금씩 갖고 있다. 그런데 평소 말할 때의 목소리는 한층 저음인 알토에 가깝다. 신기할 정도다.
“클래식음악에 쉽게 접근하려면 오페라부터 시작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일단 볼거리가 많잖아요. 그 중에서도 하나를 추천하자면 역시 ‘세빌리아의 이발사’죠. 굉장히 재미있거든요. 기분좋은 유쾌함으로 가득 찬, 사랑스러운 오페라에요.”
음악과 발성적으로 좀 더 성숙하게 되면 라보엠의 미미,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를 해보고 싶다. 피가로의 결혼 수잔나도 좋다.
좀 무리겠다 싶었지만 이번 공연에서 부를 아리아 한 토막을 부탁했다. “여기서요?”하면서도 윤씨는 곧바로 목청을 열었다. 1막에서 로지나가 부르는 ‘들렸던 음성’이 하프처럼 흘러나왔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나오는 대표적 아리아로 끝내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고 말겠다는 내용이다.
어쩐지 그녀의 노래는 지금까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온 한 음악가의 고백이자, 내일을 향한 씩씩한 선언문처럼 들렸다. (공연문의 서울시오페라단 02-399-1783)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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