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첫남북정상회담…대북송금파문-남남갈등에‘흠집’

입력 2009-08-18 14:3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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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시절 '3단계 통일론'을 내놓았고 대통령이 된 뒤 햇볕정책으로 역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그의 외교적 노력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햇볕정책 추진은 북한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결국 남남(南南) 갈등을 유발했다.

▽3단계 통일론에서 6·15공동선언으로=김 전 대통령은 신민당 대통령후보였던 1971년 3단계 통일론을 제창했다. 남북이 연합과 연방 단계를 거쳐 완전한 통일로 나가야 한다는 점진적, 단계적 통일론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 통일방안을 더욱 구체화했다. 1998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 평화정착에 토대를 두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일관된 대북정책을 추진했다. 만성적인 경제난에 시달리던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우리 민족끼리'라는 대남전략을 세우고 화답하면서 2000년 6월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졌고 6·15공동선언이 나왔다. 장명봉 국민대 법학과 교수는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제도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나아가 '사실상의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이를 계기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문제의 해결방안과 남북 교류협력이 활성화되는 등 외견상 남북관계가 이전에 비해 활성화됐다. 그의 집권 기간 방북 인원은 관광객을 제외하고 1998년 3317명에서 2002년 1만3877명으로 늘었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16차례의 이산가족 상봉, 7차례의 화상 상봉 등이 이뤄졌다.

그는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현대그룹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4억5000만 달러를 정상회담 대가로 송금한 사실이 집권 말기에 드러났다. 또 각종 지원과 경협의 대가로 북한에 제공된 현금 등이 북한 체제 유지와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전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햇볕정책 구현의 수단이 된 외교=김 전 대통령은 외교적 역량만큼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에 충만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는 경제위기 속에서도 그의 외교적 역량은 빛을 발했다. 요하네스 라우 전 독일 대통령은 "김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은 독일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도움을 주는 동기가 됐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는 1999년 9월 뉴질랜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동티모르 사태'를 국제적 이슈로 점화시키는 등 다자회의에서 의제를 주도하는 외교적 역량을 보이기도 했다.

1998년 한일 정상회담에서 '21세기 파트너십 선언'을 발표한 뒤 한일관계는 우호·협력관계 시대로 접어들었다. 러시아와는 집권 초기에 외교관 맞추방 사건으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지만 대북정책을 둘러싼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등 안정적인 4강 외교를 추진했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 이후 외교의 향방은 햇볕정책의 성쇠와 맥을 같이했다. 그는 당초 햇볕정책이 성공하려면 한미관계가 먼저라는 기본전략을 세웠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 비선 라인에서 철저하게 비공개로 추진됐지만 한미 고위급 레벨에선 모든 정보가 공유됐다. 이런 관계를 바탕으로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 말기까지 한미간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데 고무돼 부시 행정부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부시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1년 3월 한미 정상회담을 서둘렀다. 그 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의구심(skepticism)을 갖고 있다"며 북-미 대화 거부 의사를 나타낸 것은 한국 외교의 참화(慘禍)로 기록됐다.

외부적 여건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2001년 9·11테러로 미국의 대외관이 바뀌면서 남북관계도 영향을 받았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면서 햇볕정책도 서서히 힘을 잃었다. '달라진 미국'이라는 냉엄한 국제정치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패착이었다. 여기에 북-미 대화를 거부한 채 은밀하게 핵개발을 추진했던 북한의 이중성은 김 전 대통령의 외교적 성과의 빛을 바래게 만들었다.

동아일보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동아일보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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