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사람은 왜]‘천재 음악소녀’의 귀환…우타다 히카루

입력 2010-01-07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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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디바’로 불리는 여가수 우타다 히카루.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함께 작사, 작곡 실력까지 갖춘 싱어송라이터다. ☞ 사진 더 보기



우타다 히카루는 일본의 '디바'로 불린다. 흑인 R&B 가수 느낌이 풍기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대중성이 두드러진 노래로 남녀노소 팬을 사로잡았다.

1999년 발매한 우타다 히카루의 첫 앨범 'FIRST LOVE'는 765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전무후무한 일본 역대 음반 최다 판매량 기록이다. 해외에서 팔린 것까지 합치면 이 음반의 판매량은 약 990만장에 이른다.

충격을 몰고온 '천재 음악소녀'

우타다 히카루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음악인인 데다 미국에서 자유로운 학창 시절을 보내며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특히 엔카 가수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고운 목소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무명그룹 가수로 활동하던 중 1998년 15세의 나이로 일본에서 첫 싱글 'Automatic/time will tell'을 발표하고 솔로로 데뷔했다. 8cm, 12cm의 두 가지 형태로 발매된 데뷔 음반은 입소문을 통해 인기를 모으며 이후 200만장 이상 판매됐다.

'Automatic'의 뮤직비디오는 집안과 스튜디오에서 대충 촬영한 듯 촌스러웠다. 일본 가요계에선 당시 주로 미소녀 아이돌이나 섹시한 여가수가 각광받고 있었기 때문에 예쁘지도 않고 춤도 못 추는 우타다 히카루가 뜰 것이라 예상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12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세련미가 느껴지는 R&B풍의 노래 자체는 J-POP계에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다. 더구나 겨우 15세에 불과한 어린 소녀가 이처럼 멜로디가 뛰어난 노래를 직접 작곡, 작사하고 R&B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 놀라웠다.

'미국에서 온 천재 음악소녀', '가창력이 뛰어난 소녀가수'로 평가된 우타다 히카루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며 데뷔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톱스타가 됐다.

첫 싱글을 낸 지 4개월만인 1999년 3월 우타다 히카루는 첫 앨범 'FIRST LOVE'를 발표했다. 앨범이 나오자마자 일본 음반 매장에는 그의 목소리와 음악에 매료된 팬들이 앨범을 사기 위해 줄을 섰다. 'FIRST LOVE'는 764만8820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다.

특히 이 앨범에 수록된 감성적인 발라드곡 'FIRST LOVE'는 당시 일본 어디를 가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저음과 고음을 매끄럽게 오가며 머라이어 캐리 등 미국 팝가수를 연상케 한 우타다 히카루의 화려한 음역, 부드러운 기타와 피아노 선율,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애절한 가사가 돋보였다.

실언…실패…이혼… 시련의 연속

우타다 히카루는 'FIRST LOVE'의 성공을 통해 일본 최고의 여가수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했다. 또래의 다른 여가수들과 달리 TV 출연을 자제하며 신비주의 전략을 내세워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기도 했다.

'Can You Keep A Secret?' 'Wait & See~리스크' 등 나오는 음반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면서 2001년엔 'traveling'처럼 자신의 스타일에서 벗어난 실험적인 노래도 선보였다.

그러나 높은 인기만큼 많은 아픔과 시련도 뒤따랐다. 한창 주가를 올리던 2000년 일본의 인기 오락프로그램 'HEY!HEY!HEY!'에 출연한 그는 진행자들과 여가수 쿠라키 마이를 가리켜 "우타다의 짝퉁"이라는 농담을 주고받아 물의를 일으켰다.



이 방송을 본 쿠라키 마이의 팬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언론에서 크게 다루자 우타다 히카루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 해명하고 사죄까지 했다. 그는 예의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에게 '건방진 가수'로 불리며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건강도 문제였다. 2002년 4월 난소 종양 진단이 내려졌다. 적출 수술을 받은 뒤에도 약 부작용에 시달리며 스케줄을 전부 취소할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됐다. 우타다 히카루의 가수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자 라이벌로 꼽히던 하마사키 아유미가 독보적인 J-POP계의 '디바'로 부상했다.

'일본 최고의 가수'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고 2002년부터 미국, 유럽 음악계에 야심 차게 도전했지만 결과는 신통찮았다. 미국에서 Utada란 이름으로 선보인 음반은 현지에선 썰렁한 반응을 얻은 반면, 일본에서만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2002년 9월 19세의 나이로 25세 연상의 사진작가 키리야 카즈아키와 결혼한 것도 치명적이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결정한 우타다 히카루의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4년 6개월만인 2007년 이혼했다.

대중의 품으로 돌아온 그녀

이 같은 개인사가 음악에도 영향을 끼친 걸까. 대중성이 강점인 우타다 히카루의 음악은 갈수록 변질돼 힘이 잔뜩 들어간 듯 난해한 곡들이 이어졌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듣던 '국민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데뷔 때부터 밀리언셀러를 연발하던 우타다 히카루의 음반은 갈수록 판매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 음반시장이 전체적으로 축소된 탓도 있지만, 대중적인 감성에서 벗어난 어려운 곡 스타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음반에 수록된 목소리와 라이브 실력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며 가창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늘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인지 우타다 히카루의 라이브 무대는 예전에 비해 목소리가 떨리거나 음색이 고르지 못한 경우가 잦았다.



2004년 1년여 만에 일본에서 선보인 13번째 싱글 '타레카노 네가이가 카나우 코로'를 시작으로 음반 판매량은 현저하게 줄었다. 급기야 2005년 15번째 싱글 'Passion'은 오리콘 주간차트 4위에 머물러 '일본을 대표하는 여가수'로 불리던 그의 자존심을 구겼다.

내리막길을 걷던 우타다 히카루가 다시 정상에 오른 것은 2007년 발표한 18번째 싱글 'Flavor Of Life'였다.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애절한 멜로디와 가사로 표현한 이 곡은 그가 '천재 음악소녀'로 각광받던 시절 만든 노래와 비슷했다.

'Flavor Of Life'는 일본 인기 드라마 '꽃보다 남자 시즌2'에 삽입곡으로 쓰이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시원한 느낌의 오리지널 버전과 함께 슬픈 감성이 확연히 느껴지는 발라드 버전이 고루 사랑받으며 음반은 65만장 이상 팔렸다.

그는 미국에서도 지난해 두 번째 앨범 'This Is The One'을 발표해 도약을 꿈꾸고 있다. 2004년 발표한 미국 데뷔 앨범 'EXODUS'와 달리, 두 번째 앨범에는 듣고 따라 부르기 편한 노래들을 선보였다.

'Flavor Of Life'로 대중의 품으로 돌아온 우타다 히카루는 최근 실험적인 음악과 대중성을 앞세운 음악을 번갈아 선보이고 있다. 이런 시도는 그가 아티스트로서 성장하는 동시에 대중적인 인기 면에서도 다시 정상을 되찾는 결과를 낳았다.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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