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열의 멀리건] 나훈아와 우즈의 기자회견

입력 2010-02-21 1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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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우즈. 스포츠동아 DB

타이거 우즈. 스포츠동아 DB

2008년 1월 25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한국 대중가요의 거인 나훈아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동안 실체도 없는 소문에 대한 진실을 해명하는 자리였다. 본인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해명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나훈아의 회견 자리는 한국 언론에 대한 성토장이나 다름없었다.

실제 몇 개월 동안 신문지상과 인터넷을 덮은 소문이 밝혀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400여명의 기자와 팬들까지 모인 회견이었다.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았던 터라 뒷말이 많았다. 한 인터넷 언론은 탁자에 올라 바지를 내리려고 했던 장면을 두고 하나의 퍼포먼스 같았다고 평했다.
아무튼 이후 나훈아에 대한 소문은 사라졌다.

2010년 2월 20일(한국시간) ‘골프 황제’타이거 우즈는 PGA 본부가 있는 폰테베드라 비치 TPC 소그라에서 성명서를 읽었다. 미국의 미디어들은 기자회견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즈가 선택한 40명의 관계자(기자는 6명 가량)를 불러 놓고 질문도 받지 않는 일방적인 성명서 낭독이기 때문이었다.

40명 가운데 골프관계자는 팀 핀첨 커미셔너와 PGA 투어 선수 노타 비게이 뿐이었다. 스탠포드 대학 동문이며 친구인 비게이는 멕시코 대회를 포기하고 플로리다로 날아와 우즈를 위로했다.

우즈는 지난 해 추수감사절 교통사고 이후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나타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잘못했다”며 모든 성 추문을 인정했다. “나를 롤 모델로 생각했다가 배신감을 느낀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우즈의 성명서 낭독은 13분30초 동안 이어졌고 성명서를 읽은 뒤 어머니 쿨티다를 포옹하고 회견장을 빠져 나갔다.

아내 엘린 노르데그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우즈를 포함해 지난해 약물복용과 관련된 거짓말이 들통 난 뉴욕 양키스의 알렉스 로드리게스, 성추행으로 재판정에 섰던 LA 레이커스 코비 브라이언트 등 슈퍼스타 3인의 공통점은 사과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날 우즈의 회견 때(미 동부시간으로 오전 11시부터 시작됐다) 뉴욕 증권거래소의 거래가 한산했다고 한다. 미국인들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우즈가 어떤 발언을 할지에 관심을 모았던 게 사실이다.

일방적인 회견 방식부터 세계 최고 스타답게 자신의 입맛에 맞게 진행했다. 카메라가 딱 2대 비치됐다. 성명서를 읽는 도중 정면을 찍는 카메라의 전원이 꺼져 고의로 그런 게 아니냐는 의심도 받고 있다.

우즈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어머니 포옹 장면은 뒤에서만 비쳐졌다.

우즈의 회견 후 반응은 극과 극이다. 사실 회견 전부터 문제가 있었다. “우즈는 이기적이다. 기자회견을 월요일하면 좋을 텐데 왜 골프가 한창 진행 중인 금요일 날 하는가. 스폰서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고 어니 엘스는 꼬집었다. 공교롭게도 이번 주 투산에서 벌어지는 매치플레이 대회의 스폰서는 금융컨설턴트 액센추어다. 우즈의 성 추문이 속속 드러날 때 가장 먼저 스폰서십을 포기한 회사다.

회견 뒤 골프 관계자들은 대부분 진심어린 반성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기자들과 이미지 전문가들은 “여전히 오만하고 마치 회사의 일방적인 홍보를 하는 듯했다”며 혹평했다. 인터넷 사이트의 제목들은 ‘우즈가 sincere 했는가’였다. Sincere는 진심어린, 거짓 없는 뜻의 형용사다.

특히 미디어들은 우즈가 자신 외에 아내와 어머니까지 취재하는 타블로이드 신문에게 자제해달라고 했지만 전체 언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공격적인 모습이었다고 지적했다. 성명서 발표도 너무 많이 준비된 로봇과 같았다고 했다. 2년 전 한국의 대중가요 스타는 소문 해명을 위한 회견을 했고, ‘골프 황제’는 사실로 드러난 성추문의 잘못을 뉘우치는 일방적인 회견을 소수만 모아놓고 한 게 달랐다.

LA | 문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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