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강 한국 쇼트트랙의 추악한 이면이 드러났다. 이정수는 대한체육회 감사에서 세계선수권대회 불참을 강요받았다고 털어놨다. 스포츠동아 DB
오랜 진통 끝에 파벌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전횡과 담합이라는 더 심각한 악성 종양이 자리잡았다. 소문만 무성했던 쇼트트랙의 추악한 이면이 사실로 드러나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대한체육회는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 쇼트트랙 3관왕 안현수의 아버지 안기원 씨의 폭로로 시작된 ‘이정수 파문’에 대해 3월 30일부터 4월 7일까지 특별감사를 실시하고 8일 그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결과 이정수와 김성일이 전재목 코치의 강압으로 ‘출전하지 않겠다’는 사유서를 작성해 우승할 경우 국가대표 선발전 면제 해택이 주어지는 쇼트트랙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을 포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쇼트 파벌싸움 사라졌나 했더니
이젠 사전모의 ‘밀어주기’ 담합
○파벌의 상처에서 돋아난 밀어주기 관행인가?
쇼트트랙은 2006년까지 한체대(한국체대)와 비한체대가 학연으로 얽혀 코치 선임권, 대표팀 선발 문제로 수년간 대립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 직전에는 한체대 소속 안현수가 남자대표팀을 떠나 한체대 출신 코치가 있는 여자대표팀에서 훈련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까지 연출했다. 결국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체대 안현수와 비한체대 이호석이 충돌해 실격한 후 파벌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라 사회적인 질타를 받았다. 당시 빙상연맹회장이었던 현 박성인 밴쿠버올림픽선수단장이 대국민사과를 하며 파벌싸움 근절을 약속했다.
결국 한체대파 전명규 현 부회장, 비한체대파 유태욱 부회장이 휴전하며 갈등이 봉합됐지만 이후 오히려 양 부회장이 대표팀 선발에 대해 전횡을 휘두르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메달 땄으면 알아서 양보해라?
한국 쇼트트랙은 111.12m의 짧은 타원형 트랙에서 열리는 경기 특성을 활용해 공간을 함께 지키고 곡선구간에서 함께 치고 빠지는 등 현란한 협동작전으로 좋은 성적을 올려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에이스를 위해 나머지 선수들이 희생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한 쇼트트랙 선수 아버지는 “몇 차례 국제대회에서 페이스메이커를 하며 에이스의 우승을 도운 한 여자선수를 국가대표로 뽑아주기 위해 연맹이 선발규정을 바꾼 적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실체로 드러난 담합, 그리고 꼭 밝혀야할 전횡의 실체
대한체육회의 감사에서 전재목 코치는 “선수들이 자의적으로 불출전을 결정했고 사유서 문안만 불러줬다”고 상반된 내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국가대표 선발전 직전 일부 선수들과 개인코치, 소속팀코치 등이 모여 ‘함께 국가대표에 뽑힐 수 있도록 상호 협조하고 이후에는 모두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할 수 있도록 역시 상호 협조한다’고 협의한 사실이 밝혀졌다. 국가대표 선발을 위해 일부 코치와 선수들이 사전에 모여 ‘나눠먹기’를 약속했다는 추악한 진실이다.
전재목 코치는 부인하고 있으나 이 협의를 근거로 자신이 지도한 곽윤기의 세계선수권우승을 위해 이정수에게 불참을 강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감사로 빙상연맹의 어떤 고위 관계자가 전횡을 휘둘러 이같은 담합을 주도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김용 대한체육회 감사실장은 “이번 감사의 목적은 ‘불출전 강요를 받았나’였다. 전재목 코치가 부인해 조사를 더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빙상연맹에 대표팀 선발 모의여부 규명 및 관련자 처벌과 함께 외부강압 여부를 조사하고 만약 불가할 경우 연맹 명의의 형사고발 조치를 요구했다”며 “빙상연맹 스스로 밝히기 어려우면 사법기관을 통해서라도 철저히 규명하라는 뜻이다. 1개월 이내에 조치할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번 감사는 평창동계올림픽유치를 위해 뛰고 있는 대한체육회 박용성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결과 발표 후 빙상연맹은 “철저하게 조사하겠다”고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그러나 새로운 쇼트트랙 대표팀을 구성하는 선발전이 당장 23일로 예정돼 또 다른 분란도 염려되는 상황이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