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추억을 간직한 ‘초롱이’ 이영표가 사상 첫 원정월드컵 16강이란 또 다른 역사에 도전한다. 2002년 스물 다섯 살이던 그는 이제 어느덧 서른 세 살이 됐다. 마지막 월드컵을 맞는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스포츠동아DB
우상 마라도나 보며 반복훈련
이제 내 인생 세번째 월드컵
아르헨 감독 마라도나 앞에서
리틀 마라도나 메시를 잡겠다
하루에 버스 두 대만 다닐 정도로 시골이던 강원도 홍천에서의 어린 시절. 유일한 재미는 친구들과 함께 산길을 뛰어노는 것이었다.
부지런히 그라운드를 누비는 체력은 타고난 게 아니라, 어쩌면 그 때부터 길러진 것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한 그가 축구화를 처음 신은 건 안양초등학교 4학년 때.
키는 작아도 발이 빨랐던 그를 눈여겨본 축구부 감독의 권유 덕분이었다.
특기생으로 안양중학교에 들어간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개인 훈련을 소화했다. 안양공고를 거쳐 건국대를 졸업하고 프로 입단 뒤에도, 그의 개인 훈련은 하루도 거르는 날 없이 계속됐다.
● 1989년 여름…영표의 추억
1989년 여름. 우리는 날마다 풀풀∼ 먼지나는 흙바닥에서 공을 찼다. 재미로 축구를 시작했지만,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 가끔은 억지로 축구를 하기도 했던 그 때. 해질 무렵까지 공을 차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언제나 배가 고팠고, 우리는 꼭 튀김 포장마차에 들어가 50원짜리 야채, 고구마, 계란 튀김을 사 먹었다...*^^*∼(100원밖에 없는 날은 으으윽∼ -.- :: 선택의 고통)
<…중략>
왼쪽에 있는 친구 ‘형수’는 다람쥐 같은 왼쪽 윙백이었고, 오른쪽에 있는 ‘종화’는 헤딩을 잘 하는 수비수였다. 지금쯤 이놈들. 분명 어느 조기축구회에서 아침마다 예전의 실력들을 뽐내고 있겠지. 89년엔 우리가 흘린 땀과 추억이 숨겨져 있다. 아무도 모르는 재미있는 일들과 함께….
- 2005년 2월 어느날…이영표 미니홈피
● 혜성처럼 나타나다
‘초롱이’ 이영표(33)가 1999년 4월 올림픽팀에 이름을 올렸을 때만해도 주위에선 고개를 갸우뚱했다. 체격(177cm·66kg)도 축구선수 치곤 초라했고, 청소년대표 경력도 없는 무명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이영표는 상대 선수를 현혹시키는 현란한 드리블과 지치지 않는 무서운 체력으로 박진섭과 함께 ‘좌영표, 우진섭’이란 신드롬을 만들어내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듬해 7월 한중전 때에는 A매치 데뷔골을 신고하며 서서히 자신의 입지를 넓혀 갔다.
●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중심에 서다
2002년 한일월드컵. 부지런한 움직임과 끈기 있는 수비, 정확한 패스 능력으로 일찌감치 히딩크 감독의 눈길을 사로잡은 그는 부상이란 암초를 만난다. 평가전 일정을 모두 마치고, 결전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대표팀 자체 연습 도중 차두리와 충돌해 종아리를 다친 그에게 치료에 3주가 걸린다는 진단이 나왔고, 주위에선 ‘어렵겠다’는 회의론이 일었다.
이를 보기 좋게 깨뜨린 건 이영표 자신이었다. 포기하지 않은 히딩크 감독의 기대를 저 버리지 않았고, 극적으로 회복된 이영표는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전부터 출전해 4강 신화를 이끌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기차놀이 허정무호에서 박지성(맨 앞) 등 후배들과 함께 한 기쁨의 순간. 팬들은 이영표(맨 뒤)의 환한 웃음을 남아공에서 다시 볼 수 있길 바라고 있다. 스포츠동아DB
● 강원도 소년, 세계를 놀라게 하다
한일월드컵을 마치고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 지휘봉을 잡은 히딩크 감독은 한국 대표팀의 박지성과 이영표, ‘애제자’ 두 명을 에인트호벤으로 데리고 간다. 입단 초기부터 빠르게 팀에 적응한 그는 박지성과 함께 ‘코리안 듀오’로 활약하며 팀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4강까지 이끈다. 2004년에는 에레디비지에 최우수선수(MVP)로 뽑히는 등 유럽무대에서도 기량을 인정받는다.
이듬해 마틴 욜 감독이 이끄는 토트넘 핫스퍼에 입단, 박지성에 이어 한국인 2호 프리미어리거가 된 이영표는 단숨에 주전 자리를 꿰차는 등 맹활약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도 한국 대표로 출전한 그는 토트넘에서 주전 경쟁에서 밀리자 2008년 독일 분데스리가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입단했지만 더 큰 도약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지난해 7월, 주변의 예상을 깨고 사우디아라비아의 강호 알 힐랄로 이적했고, 2009∼2010시즌 알 힐랄 소속으로 리그 전 경기에 출전, ‘철인’이란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 인생의 큰 스승과 가족
이영표는 2005년 말,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히딩크 감독의 지도 아래 5년간 선수로서 활동했다. 그의 팀 장악력과 훈련은 아주 좋았다. 히딩크 감독은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고 밝혔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를 이끄는 방법과 효과적인 수비 방법을 가르쳤다”고 했다. 히딩크에 대한 그의 절대 믿음은 여타 다른 태극전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에게 히딩크 감독이 가장 큰 스승이라면 그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바로 가족.
월드컵 이듬해인 2003년 6월, 장보윤 씨와 결혼한 그는 딸 둘을 두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에게 가족은 절대가치다. 이영표가 부인 장 씨를 만난 건 2000년 K리그 올스타전 때였다.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당시 대학 4학년이던 장보윤 씨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고 두 사람은 3년 뒤 부부의 연을 맺었다.
● 헛다리짚기, 마라도나와 만나다
지난해 5월, 이영표는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니다’란 제목의 책을 펴냈다. 대학생 이승국 씨와의 대화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책에서 그는 어릴 때 먹던 보리밥에 풋고추 맛을 잊지 못하고, 라면을 좋아해 유럽무대에서 뛸 때 박스째 라면을 가져다 먹었던 추억도 되새겼다.
이영표의 트레이드마크로 불리는 ‘헛다리짚기 드리블’. 어렸을 때부터 이영표가 유독 드리블 훈련에 정성을 쏟은 건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 때문이었다. 마라도나의 드리블에 마음을 뺏긴 소년은 마라도나 경기 장면이 담긴 비디오를 반복해보며 훈련에 열중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그는 어렸을 때 우상을 만난다. 마라도나는 한국과 같은 B조에 속한 아르헨티나 감독으로 남아공을 찾는다. 이영표는 한 때 자신의 우상이었던 마라도나 앞에서, 마라도나의 대를 잇는 아르헨티나의 세계적인 스타 메시의 마크맨으로 뛸 가능성이 높다. 서른 세살로 마지막 월드컵을 앞둔 그에게 이번 남아공월드컵이 갖는 의미가 남다른 건 그래서다.
● 사진으로 본 ‘초롱이’ 이영표
① “대∼한민국” 부상 아픔을 딛고 조별리그 3차전부터 나선 2002한일월드컵. 그는 4강 신화의 당당한 주역이었다.
② 월드컵 영광을 함께 했던 거스 히딩크 감독(가운데)을 따라 박지성과 함께 PSV에인트호벤 유니폼을 입은 이영표(오른쪽).
③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로 처음 만난 인연은 결국 부부의 연으로 꽃을 피웠다. 2003년 6월 장보윤 씨와의 결혼식.
④ 번째 월드컵과 앙리 이영표가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프랑스 간판 티에리 앙리와 볼을 다투고 있다.
● 이영표 프로필
생년월일= 1977년 4월23일
출생= 강원도 홍천
신체= 177cm, 67kg
소속팀= 알 힐랄 FC(사우디아라비아)
포지션= DF
학력= 경기 안양초-안양중-안양공고-건국대
데뷔= 1999년 안양LG
경력= 안양LG(1999∼2003)- 네덜란드 PSV에인트호벤(2003∼2005)- 잉글랜드 토트넘 핫스퍼FC(2005∼2008)-독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2008∼2009)-알 힐랄FC(2009∼)
A매치 출장= 113경기 5득점
A매치 데뷔= 1999.6.12 멕시코(코리아컵)
A매치 첫득점= 2000.7.28. 중국전 (한중 정기전)
월드컵 출전 경험= 2회(2002한일월드컵·2006독일월드컵)
김도헌 기자 dohone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