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아시안게임 야구국가대표팀 엔트리가 발표됐다. 국가대표가 지니는 상징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주변환경이나 여건은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차이가 크다. 요즘은 국가대표팀이 구성되면 드림팀이라는 세련된 호칭을 붙여주고 지원도 ‘꿈’처럼 해주던데 필자가 뛰던 그 시절엔 말그대로 ‘국가대표’였다.
70년대 국가대표팀의 에피소드다. 77년 10월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대회를 앞두고 국가대표팀은 서울 도봉동에 있는 한 여관을 잡고 합숙훈련을 할 예정이었다. 고교와 대학선발을 거쳤지만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필자는 자부심에 설레는 마음으로 여관으로 향했다. 첫날 룸메이트는 배대웅 선배.
그 첫날이었다. 당시 도봉동의 저녁 날씨는 꽤나 쌀쌀한 편이었는데 마음씨 좋은 여관주인이 딴에는 선수단을 특별히 배려한다고 방마다 연탄불을 넣어줬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여름 내내 불을 피우지 않았던 연탄아궁이가 결국 탈이 났고 내 방에 연탄가스가 새어 들어왔다. 잠결에도 너무 머리가 아파 새벽에 깸과 동시에 ‘연탄가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배대웅 선배를 깨우고 거의 기다시피해서 김응룡 감독님 방으로 찾아갔다. 시간은 새벽 4시 무렵. 놀라서 잠이 깬 감독님은 우리를 데리고 큰 길로 나가 차를 잡으려고 했지만 막 통금이 해제된 그 시간이 택시가 있을 리는 만무했다. 점점 당황하던 김 감독님은 안되겠다고 생각하셨는지 지나가는 화물차를 우격다짐으로 가로막다시피 해서 근처 녹십자병원까지 갈 수 있었다.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은 덕분에 괜찮아졌으나 지금 생각해도 참 황당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 이후 대표팀의 숙소는 도동봉의 여관에서 을지로에 있는 모 호텔로 승격됐다. 단순한 추억으로 돌리기엔 아찔한 사건이었고 당시 대표팀의 열악한 지원상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김응룡 감독님의 당시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을 참을 수 없다. 호랑이처럼 엄격한 모습을 한순간도 잃은 적이 없던 감독님이 체면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코끼리만한 덩치로 차를 잡기위해 안간힘을 쓰던 그 광경이란…. “고맙습니다. 감독님!”
그런 노력들 덕분이었는지 아무튼 당시 대표팀은 그 대회에서 한국야구사에 길이 남을 세계대회 최초 우승이라는 영광을 맛봤다.임 호 균
삼미∼롯데∼청보∼태평양에서 선수로, LG∼삼성에서 코치로, MBC와 SBS에서 방송해설을 했다. 미국 세인트토머스대학 스포츠행정학 석사. 선수와 코치 관계는 상호간에 믿음과 존중, 인내가 이루어져야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