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호균의 7080 야구] “난, 고향팀 절대 못 떠나” 80년대 트레이드 진풍경

입력 2010-08-1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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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초창기, 트레이드라는 말은 생소한 단어였다. 선수들 자체도 트레이드를 받아들이기 거부했던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이었다. 프로야구는 아마추어 야구팀에 소속돼 있던 지역 연고 선수들을 선발해 팀을 구성하면서 출범했다. 그래서인지 80년대 초에 각 지역 연고팀에 소속돼 있던 선수들은 고향팀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당연한 결과로 트레이드가 이루어지면 지역 연고팬보다 오히려 선수 개인이 자존심과 서운함 때문에 반발도 심했다.

필자는 프로야구 최초 대형 트레이드의 한 가운데에 섰다. 83년 시즌 후에 삼미 유니폼을 입고 있다가 롯데의 4명(김정수 권두조 우경하 박정후)과 트레이드가 됐는데, 당시엔 사건 아닌 사건이었다. 1대4 대형 트레이드는 아마추어 야구만 경험했던 선수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당시 선수들에겐 연고팀에 대한 사랑, 열정 등이 요즘보다 상대적으로 더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대부분이 트레이드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었다. 트레이드 대상이 되면 은퇴도 불사한다는 생각을 가진 선수도 많았다. 나 또한 트레이드에 반대했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구단주인 삼미그룹 김현철 회장에게 직접 찾아가 트레이드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전했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83년 당시 필자는 삼미에서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재일교포 투수인 장명부와 함께 마운드를 책임졌다. 당시 팀당 시즌 100경기를 치르던 시절이었는데, 83년 장명부는 60경기에 등판해 36차례 완투하며 30승을 올렸고, 나 또한 35경기에 등판해 15차례 완투하면서 12승을 거뒀다. 열정을 갖고 뛰었던 시즌이었고, 전년도 꼴찌팀 삼미도 곧바로 3위까지 뛰어올랐다. 그런데도 시즌 후 1대4 트레이드를 통보받았으니 나로서는 사실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트레이드란 프로야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구단과 구단의 이해득실을 따져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얼마 전에 이루어진 SK와 LG의 3대4 트레이드 역시 팀의 전력향상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프로야구가 연륜을 거듭하면서 이젠 우리 프로야구도 트레이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시기가 됐다. 그러면서 단장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다. 프로야구에서 구단 단장은 현장과 상의해 정확한 데이터와 팀의 손익계산을 해 중·단기적으로 팀의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트레이드에 심혈을 기울여야하기 때문이다. 단장은 유니폼만 입지 않았을 뿐 현장의 모든 것을 관리지원하고 선수단의 모든 상황을 늘 숙지해야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임 호 균

삼미∼롯데∼청보∼태평양에서 선수로, LG∼삼성에서 코치로, MBC와 SBS에서 방송해설을 했다. 미국 세인트토머스대학 스포츠행정학 석사. 선수와 코치 관계는 상호간에 믿음과 존중, 인내가 이루어져야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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