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 서울 청담동 킥스튜디오에서 만난 박칼린 감독이 피아노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칼린 감독은 이날 자신이 슈퍼바이저를 맡은 걸작 뮤지컬 ‘틱틱붐’을 무대에 올렸다.
노래 들으면 성격·인성 다 보여요
남격, 그래서 ‘사람’으로 뽑았죠
리더십 철학? 변치 않는 믿음!
뜨거운 관심 옥주현에 부담 하소연
나도 실수 많은 인간인데…
커다란 채찍하나 받은 기분이예요
KBS 2TV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남자 그리고 하모니·이하 남격 하모니)’에서 오합지졸 합창단으로 ‘음악’을 넘어 ‘인간의 하모니’를 이루는 과정을 보여주어 국민적인 관심을 모았던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43).
개인 인터뷰를 ‘전혀’라고 할 만큼 사양하는 박칼린 감독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 달 여에 가까운 설득과 기다림 끝에 결국 9월 30일 오후 서울 청담동의 킥 스튜디오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남격 하모니’는 막을 내렸지만 박 감독의 일상은 여전히 바쁘다. 대학 강의, 개인 레슨, 케이블TV 채널 아리랑TV의 토크쇼 진행. 여기에 9월 30일 첫 공연에 들어가는 뮤지컬 ‘틱틱붐’의 슈퍼바이저까지. 스타 연예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빡빡하다.
먼저 ‘한풀이’를 좀 했다. 기자들 사이에 “대통령보다 만나기 힘들다”라는 원성(?)이 자자할 정도로 인터뷰를 안 하는 이유부터 물었다.
“원래 안 좋아했어요. 아주 초창기 때부터. 난 굉장히 프라이빗(개인적인)한 사람이에요. 지금도 버스도 택시도 잘 안 다니는 곳에 살고 있을 정도죠.”
최근 자신의 관련 기사들이 온라인 포털 사이트에 넘치는 것을 보고 평소 가까이 지내는 배우 옥주현에게 “넌 어떻게 이러면서 10년 이상을 살았니”라고 푸념했다고 한다.
“전 연예인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니잖아요. ‘남격’으로 부각이 됐지만, 어차피 전 제 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죠. 유명인들의 손톱만큼도 안 되겠지만 이번 일(언론 노출)을 겪으며 ‘그 사람들, 정말 고충이 많겠다’ 싶더라고요. 참 강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자신의 신장병 투병에 관한 기사에 대해 “너무 과장됐어요. 난 사람들이 관 짜주는 줄 알았어요. 열 개쯤 오면 그 중 하나 고르려고 했다니까요”라고 크게 웃었다.
박칼린 감독은 9월 30일부터 11월 7일까지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틱틱붐’에 슈퍼바이저로 참여한다. 뮤지컬 ‘렌트’의 작곡가 조나단 라슨의 유작인 ‘틱틱붐’은 젊고 가난한 작곡가의 꿈을 그린 자전적인 작품이다.
주인공 ‘존’은 젊은 뮤지컬 남자배우들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배역”으로 탐내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박칼린 감독은 ‘틱틱붐’의 인기 비결에 대해 ‘진솔함’을 꼽았다. “젊은 배우들에게는 마치 자기 얘기를 하는 것 같을 것”이라고 했다.
그나저나 ‘남격 하모니’에 대한 뜨거운 대중의 관심이 고맙기도 하지만 부담이 될 것도 같았다.
“무척 고맙죠. 이런 반응을 기대하지 못했으니까요. 하던 대로 움직였을 뿐이고, 이것이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렸다면, 이는 곧 우리가 진지하게 살아왔다는 증명이 아닐까요.”
물론 부담도 크다. 길에서 그녀를 알아보고, “사인을 해 달라”거나 불쑥 사진을 찍으려 다가서는 것에 대한 부담이 아니다.
“작품으로나, 인간으로서 더 나은 사람이 되야겠다는 부담이죠. 나도, 같이 일하는 패밀리도 더 엄격하게 살아야 한다는 고민. 나도 인간이라 분명 실수를 할 텐데 말이죠. 예를 들어 운전을 하다 딱지를 떼일 수 있고, 쓰레기를 남 몰래 슬쩍 버릴 수도 있고, 주차 때문에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잖아요.”
박칼린 감독은 이런 부담을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커다란(두 손을 크게 벌려 보이며) 채찍 하나가 놓여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 “노래를 들으면 그 사람의 성격과 인성이 보여요”
뮤지컬 배우들 사이에서는 그녀에 대한 소문이 하나 있다. ‘누구든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 곧바로 사람의 성격과 인성을 꿰뚫어본다’라는 SF소설같은 얘기이다. 의외로 박칼린 감독은 이에 대해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요.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하나…,사실 노래를 안 들어도, 문만 열고 들어와도 보여요.”
‘남격 하모니’가 끝난 뒤 출연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온 얘기가 “어떻게 이렇게 조화가 잘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람을 뽑았나”였다고 한다.
오디션 때만 해도 “누구는 노래를 잘 했는데 떨어졌고, 누구는 못 했는데 합격했다”라는 뒷말이 많았다. 박칼린 감독은 “나머지 부분을 봤다”라고 했다. ‘노래’보다는 ‘사람’을 보았다는 말이다.
시험 삼아 그녀에게 “저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진지한 편이고 기사를 쓴 뒤 나중에 ‘이렇게 쓰면 더 좋았을 걸’라는 후회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주자들도 알아요. 내가 ‘바이올린이 한 명 필요한데, 알지?’하면 다들 ‘알아요’해요. 정답은 ‘좋은 사람’. 그래야 하나를 더 하더라도, 5분을 더 보내도 좋게 보낼 수 있거든요. 배우도 마찬가지. 배우와 연주자 사이에도 코드가 맞아야 해요.”
코드가 맞지 않으면 불협화음이 생긴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노래할 때 음정이 맞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연주자의 반응은 두 가지.
“나는 여기서 이렇게 힘들게 연주하고 있는데 저 따위로밖에 못 하나”하는 불만이 있는가 하면, 박칼린 감독을 찾아와 “저 친구가 음역이 떨어지는데 저와 따로 5분만 더 연습하면 안 될까요”하는 반응이 있다.
박칼린 감독이 두 손으로 깍지를 끼어 보였다.
“좋은 사람들이 모이면 이게(깍지 낀 손) 생겨요. ‘합’이라고 해야 하나요. 이런 사람들, 난 문을 열고 들어오면 보여요.”
이런 박칼린 감독도 애를 먹을 때가 있다. 무대에서 가수가 시원찮을 경우 지휘를 하는 동안 극과 극의 생각이 그녀의 머리 속을 오간다.
“하나는 ‘왜 저 배우를 골랐지’하는 자괴감. 또 하나는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못 가르쳤구나’하는 마음. 완전히 극과 극의 생각이 천사와 악마처럼 오락가락 하죠.”
◆ “다양한 내 경험의 중심을 관통하는 건 챌린지, 변화, 그리고 창의성”
원래 박칼린 감독은 긴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이다. 기자도 2009년 뮤지컬 ‘시카고’ 공연 때 긴 머리를 사자의 갈기처럼 흩날리며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본 기억이 있다.
현재는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단발 머리를 하고 있다. “왜 트레이드마크인 머리를 잘랐나”라고 물어보았다.
“올해 초에 잘랐어요. 왜 여자심리가 있잖아요. 긴 머리일 땐 ‘나 머리 자를까’하고, 짧을 땐 기르고 싶고. 하도 그러고 있으니까 (최)재림이가 듣다못해 ‘그냥 짜르세요!’하고 버럭 하더라고요. 기사로 쓰실 때는 재림이의 말 뒤에 ‘느낌표’를 다섯 개쯤 붙이셔야 해요, 하하! 그래서 잘랐어요.”
박칼린 감독이 살아 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첼리스트, 판소리, 연극배우, 뮤지컬 음악감독, 연출가, 보컬 트레이너, 작가 ….
너무 많아 열거하기도 힘들지만, 그 중심을 꿰뚫는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좋은 질문입니다. 너무 좋은 질문이라 오히려 대답하기 어렵네요”라며 한 동안 침묵했다.
“챌린지(도전), 그리고 변화. 창의적인 요소. 저에겐 ‘살아 있다는 느낌’이 중요했어요. 무에서 유는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도전하다는 것. 그것이 우연히 예술과 연관된 거죠.”
박칼린 감독에게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천재적인 음악실력 때문만은 아니다. ‘남격 하모니’를 통해 보여준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카리스마, 탁월한 지도력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상을 볼 수 있었다.
요즘 젊은 여성 사이에 그녀가 ‘워너비(wannbe:닮고 싶은 사람)’라고 하니 “아하하!” 웃는다.
“리더는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따라줘야 되잖아요. 중요한 것은 ‘믿음’. 재능을 정확히 알아내고, 그것이 발전하도록 계속 끌어줘야 ‘믿음’이 생기죠. 리더는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리더가 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진짜 끝장나는 겁니다.”
젊은 시절 윗사람으로부터 “내가 윗사람인데 이 정도도 못 하냐”라는 질책을 들은 일이 있다. 당시 20대의 박칼린은 “하고 싶은 대로 제일 못 하는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라고 새파랗게 대들었다.
박칼린 감독은 “리더도 채찍질을 당한다’라며 ‘남격 하모니’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한 출연자가 무척 괴로워했다. 거의 절망 수준이었다. 악보를 볼 줄 모르니 곡을 도저히 외우지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저걸 어떻게 해결해 줘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공부를 하게 되죠. 재림이에게 ‘우리가 저 친구 외우는 걸 해결해 보자’했어요. 그래서 따로 30분 만에 곡 외우는 법을 가르쳐줬더니, 울상이던 얼굴이 확 펴지면서 ‘선생님, 저 이제 해낼 수 있어요. 이게 어떻게 한눈에 들어오죠? 이제 저 진짜 믿으세요’ 하더라고요.”
박칼린 감독은 ‘위·아래가 있다면’이라는 전제 아래 “아랫사람한테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바로 우리에게는 채찍질”이라고 설명했다.
한 배우는 “박칼린 선생님은 평소에는 참 좋은데 ‘뭔가를 배우면’ 사람이 확 달라진다”고 했다. 그녀는 연습실을 가리키며 “저 문에 들어가면 난 달라진다”라고 했다.
“방에 들어가면, 그곳은 약속의 공간이잖아요. 뭔가를 하러 간 거잖아요. 1초도 아깝죠.”
‘할 때는 열심히, 놀 때도 열심히’가 모토다. 박칼린 감독은 “놀 때는 확실히 놀아요. 6월에는 2주 동안 완전히 사라졌었죠.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나라의 섬에 가서 2주 동안 정말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수영하고, 먹고 잔 게 전부”라고 했다.
사실 배우들의 삶 자체가 그렇다. 박칼린 감독도 20년 이상 일을 하면서 긴장과 이완이 몸에 뱄다. 1시간이면 될 회의를 2~3시간씩 끄는 걸 참지 못한다. 그래서 회의를 할 때면 늘 시작과 마칠 시간을 정한다. “세상 어떤 회의도 1시간30분이면 충분하다”라는 생각이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약속한 1시간이 그야말로 물처럼 흘러갔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박칼린 감독의 애견 ‘해태(삽살개)’가 슬그머니 다가와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
스튜디오를 나오는데 그녀가 가리켰던 연습실 문이 눈에 들어왔다. 인생에 한번쯤, 저 문을 열고 들어가 볼 수 있는 사람은 무척 행운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