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정 출발’ 실격… 지옥같은 4시간… 번복… 박태환의 긴 하루
전광판에 뜬 박태환(23·SK텔레콤)의 이름 옆에 알파벳 세 글자가 깜빡거렸다. DSQ는 ‘실격됐다(Disqualified)’는 뜻이다. 28일 오전 10시 52분(현지 시간)부터 시작된 런던 올림픽 수영 남자 자유형 400m 예선에서 3조 1위(3분46초68)로 막 터치패드를 찍은 박태환의 얼굴은 일순간 일그러졌다. 열심히 헤엄쳤는데 실격됐다는 것이다. 올림픽 2연패와 함께 세계기록(3분40초07) 도전에 나섰는데 8명이 겨루는 결선에도 오르지 못할 상황이 됐다.
물에서 나와 몸만 간단히 말린 박태환은 오전 11시 15분쯤 믹스트존(공동 취재구역)으로 왔다. “별문제 될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실격 이유가 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좀 알아봐야 될 것 같아요.” 박태환은 다소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인터뷰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이의를 제기하면 상황이 바뀔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박태환은 “일단 좀 알아보고 올게요”라며 오전 11시 20분쯤 믹스트존을 서둘러 빠져나갔다.
곧이어 박태환의 실격 사유는 부정 출발(False Start)이라는 국제수영연맹(FINA)의 발표가 나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대한수영연맹은 FINA에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동안 실격 판정을 번복한 사례가 거의 없는 FINA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떻게 준비해 온 4년인데 이대로는 도저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일이 벌어지고 1시간가량 지난 낮 12시 15분쯤 박태환 전담팀의 통역사 강민규 씨가 아쿠아틱스센터 주변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혹시 동영상 찍은 것 좀 볼 수 있나요? 없어요?” 스타트 장면을 찍은 영상을 구하느라 한국 기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대한수영연맹은 국내 한 방송사가 찍은 출발 장면을 구해 FINA에 재차 이의를 제기했다. FINA는 별다른 설명 없이 “기술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실격 판정을 번복한다”는 짧은 공식 입장을 내놨다. 대한수영연맹 관계자는 “영상 분석으로 출발 신호가 울리기 전에 박태환의 어깨가 조금 움직이긴 했지만 부정 출발의 의도는 없었다는 걸 FINA가 인정했다”고 말했다.
결선에 나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벌써 오후 3시 반. “숙소에서 쉬는 4시간 내내 답답했어요. 오후에 경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계속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죠. 편히 쉬어야 할 시간이 오히려 더 버거운 시간이었어요.” 박태환은 전담 지도자인 마이클 볼 코치가 “잘 해결될 테니 결선만 생각하라”고 했지만 집중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경기장에서 만난 박태환의 아버지 박인호 씨는 “지옥 같은 4시간이었다. 오늘 하루 담배를 두 갑이나 피웠다. 4년을 준비했는데 보여주지도 못하고 끝나버리면 얼마나 허무하겠나”라며 한숨만 쉬었다.
오후 7시 51분. 박태환은 결선 레인 6번 출발대 위에 섰다. 8명 중 제일 빠른 반응 시간(0.67초)으로 스타트했다. 300m까지 한 번도 선두를 내주지 않았다. 100m만 더 버티면 올림픽 2연패. 그런데 애를 태우며 기다린 4시간이 박태환의 진을 뺐나 보다. 뒷심이 달렸고 4번 레인의 쑨양(중국)에게 1위를 내줬다. 쑨양과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고 다시 뒤집을 힘은 없었다. 박태환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 때 세운 자신의 최고 기록(3분41초53)에 못 미치는 3분42초06으로 쑨양(3분40초14)에게 1.92초 뒤져 2위를 했다.
결선을 마치고 오후 8시쯤 박태환이 다시 믹스트존으로 나왔다. 예선 때 실격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웃으면서 나타났던 박태환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담담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오늘은 저한테 굉장히 긴 하루였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습니다. 실격 소동이 결선 경기에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지만 결과와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기대를 갖고 기다릴 판정도 없다는 데 감정이 북받치는 듯 “아, 미치겠네”라며 인터뷰 도중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기도 했다. 4년간의 준비가 엉뚱한 데서 탈이 나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이 분하고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인터뷰) 내일 하면 안 될까요. 죄송해요.” ‘마린보이’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런던=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