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한국시리즈 7차전 역전 결승 3점홈런의 주인공 유두열은 현재 안양 충훈고 인스트럭터로 야구인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쉰여섯 살 나이에도 여전히 힘차게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습은 30년 전 젊은 유두열 그대로다. 안양|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부진 헤매던 타자에 온 8회 찬스
연봉싸움으로 얼룩졌던 프로 9년
그 한방이 있었기에 후회는 안해
작년 최동원을 보내며 많은 생각
그래도 야구는 내 운명.
아직 유니폼 입을 수 있어 행복
인생은 한방이라고 한다. 롯데 유두열(56)은 19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역전 결승 3점홈런으로 우승을 결정지었다. 6차전까지 1안타에 허덕였지만, 시리즈 통산 21타수 3안타(타율 0.143) 3타점으로 최우수선수(MVP)가 됐다. 프로야구 9년간 롯데에서만 뛰며 통산 58홈런 268타점을 기록했다. 현재 안양 충훈고에서 인스트럭터로 일하고 있다. 넥센 3루수 유재신(25)은 아버지에 이어 프로야구선수로 활동 중이다. “장효조, 최동원을 떠나보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야구인은 유니폼을 입어야 행복하다. 우리는 역마살이 있다. 운명이다”는 경상도 남자를 만났다.
○모든 타순에서 뛸 수 있는 유일한 타자
1975년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한국전력에 입사했다. 대학에 갈 예정이었지만 팀이 전국대회 4강에 들지 못했다. 졸업생 가운데 포수 유두열만이 실업야구선수가 됐다. 방망이를 잘 쳤다. 어떤 타순에 가더라도 제 몫을 했다. 실업야구와 프로야구에서 1∼9번 타순을 모두 경험했다.
1979년부터 국가대표에 뽑혔다. 1980년 7월 벌어진 실업야구 올스타전의 MVP였다. 워낙 실력이 빼어나 1982년 서울에서 벌어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위해 1년간 프로 진출이 유보됐다. “군에 있던 장효조, 김시진, 정구선 등과 실업의 최동원, 심재원, 이해창, 김재박 등이 대상이었다. 프로에 간 선수를 대신해 대학선수를 많이 대표팀에 뽑았다.” ‘3점홈런의 사나이’ 한대화가 그 행운을 잡았다. “프로행이 보류된 선수들은 연고 구단으로부터 매달 100만원씩 받았다. 실업야구선수가 30만원 정도 받을 때였다. 대한야구협회에서도 20만원씩 줬다. 워커힐 호텔에서 합숙훈련을 하는데 임광정 회장이 반드시 3등 안에 들어야 한다고 했다. 사비를 털어서라도 보너스를 준다고 약속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의 기억
첫 경기는 이탈리아전. 예상을 깨고 졌다. 유두열의 병살타가 경기 흐름을 끊어버렸다. “그 경기에 지고 나서 선수들이 더욱 잘 뭉쳤다. 반전의 계기였다.” 고비는 호주전이었다. 6승1패의 상황에서 호주만 이기면 일본과 동률로 우승을 다툴 수 있었다. 경기는 꼬였다. 8회까지 5-6으로 뒤지다 9회말 장효조의 안타로 간신히 동점을 만들었다. 서스펜디드 경기가 됐다. 다음날 일본과의 야간경기를 앞두고 오전에 연장 10회부터 경기가 이어졌다. 15회 혈투 끝에 7-6으로 이겼다. 1사 만루서 유두열의 희생플라이가 결승타였다.
마침내 운명의 한·일전. 유두열은 한대화의 홈런을 대기타석에서 지켜봤다. 2-2로 팽팽하던 8회 2사 1·2루. 타석에 들어가면서 한대화가 말했다. “형님이 책임지세요.” “모 아니면 도다. 마음껏 휘둘러라.”
“숙소로 돌아오자 난리가 났다. 전두환 대통령이 온다고 했다. 선수들이 기다리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일정이 변경됐다고. 워커힐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밤새도록 놀았다. 임 회장은 약속대로 1인당 200만원씩 수표로 보너스를 줬다. 며칠 뒤 청와대로 인사를 갔다. 단복을 입고 갔는데 왜 그렇게 땀이 나던지.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타석에 있을 때보다 더 긴장됐다.”
1984년 한국시리즈 MVP 부상으로 받은 맵시나 승용차 위에서 포즈를 취한 유두열. 스포츠동아DB
○프로에 가다! 롯데와의 돈 전쟁이 기다리다!
롯데와 입단협상을 했다. 끈질긴 전쟁이었다. 롯데는 프로 입단 유보선수에게 줬던 돈을 언급했다. “A급 선수 대우를 받을 줄 알았다. 계약금 연봉 각각 2400만원. 롯데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화가 났다.” 계약금 1800만원, 연봉 2000만원에 사인했다. 2년 뒤 부산 남천동 삼익비치아파트 30평형을 샀다. 3300만원이었다. 롯데와 유두열의 연봉전쟁은 해마다 반복됐다. 시원스럽게 한번에 주고 끝내지 못하고 찔끔찔끔 액수를 올리는 스타일이 문제였다. “1983년 타격 5위에 3할을 쳤다. 당연히 올려줄 것으로 알았는데 팀이 꼴찌를 했다며 안 올려준다고 했다. 상한선 25%를 요구했다. 구단은 버틸 때마다 5%, 10%, 15%, 20%로 올렸다. 연봉계약을 안 한 선수들은 전지훈련에도 데려가지 않고 훈련도 못하게 하겠다고 했다. 결국 서로가 2.5%씩 양보해 22.5%에 도장 찍었다.”
연봉협상의 후유증은 1984년 그대로 나타났다.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유두열은 팀 성적과 개인 성적이 엇박자였다. 스토브리그마다 구단과 갈등을 빚었다. “해마다 연봉 가지고 싸웠다. 야구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훨씬 신나게 야구를 했을 텐데….”
○1984년 져주기와 운명의 그 한방
1984년 롯데는 기적의 우승을 차지했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운명의 경기를 앞두고 복선을 깔았다. 져주기였다. “롯데-삼성 경기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제주에서 벌어진 해태-OB 경기도 그랬다. 하여튼 그날 삼성 타자들이 미친 듯 방망이를 쳤다. 그런데 상황을 보더니 안 되겠다 싶었던지 나중에 표가 나게 실수를 했다.”
당시 롯데 사령탑 강병철 감독은 한국시리즈 전부터 고 최동원을 1·3·5·7차전에 등판시킨다고 했다. 최동원은 약속대로 1·3·5차전에 등판했다. 5차전에 지자 6차전에 또 나왔다. 임호균에 이어 5회부터 올라 이기고 시리즈를 최종 7차전으로 넘겼다. 유두열은 시리즈 들어 불운했다. 잘 맞은 타구마다 야수의 정면이었다. “6차전까지 딱 1안타를 쳤다. 다른 선수로 바꿨을 텐데 강 감독은 7차전에도 선발로 냈다. 대신할 선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연투를 거듭했던 최동원의 공은 평소 같지 않았다. 6회 오대석에게 솔로홈런을 맞고 4-1로 스코어가 벌어졌다. “그 때 야수들이 최동원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했다. ‘괜찮다. 우리 이길 수 있다’며 힘을 불어 넣었다.” 롯데는 따라붙었다. 7회 유두열이 중전안타로 나갔고 한문연이 우월3루타로 불러들였다. 고 장효조의 타구 판단 미스가 만든 행운이었다. 이어 정영기의 빗맞은 타구로 3-4까지 됐다. 그리고 맞이한 8회말 1사 1·3루. 김용희와 김용철이 피로한 삼성 김일융을 상대로 연속안타를 때린 뒤였다.
“타석에 들어가기 전 강병철 감독과 3루 이희수 코치가 불렀다. 강 감독은 ‘사인 잘 봐라. 스퀴즈 나갈지 모른다’고 했다. 초구 스트라이크. 사인이 언제 올지 몰라 기다렸다. 김일융은 견제를 하고 2구를 던졌다. 혹시나 했는데 이번에도 사인은 없었다. 볼. 또 견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3구째 몸쪽 낮은 직구였다. 제대로 맞은 것 같았다. 공이 외야로 날아가는 것을 봤다. 제발 파울만 되지 말라고 기도했다. 82년 한대화가 일본전에서 때렸던 그 곳으로 공이 꽂혔다.”
6-4로 경기를 뒤집자 최동원은 다시 살아났다. “정말 대단했다. 공 던지는 것이 달랐다. 스타킹을 만지고 안경을 고쳐 쓴 뒤 던지는 폼이 마치 1차전 같았다. 그동안 많은 투수를 만났지만 최동원은 최고였다. 실업야구 시절에는 커브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았다. 불멸의 투수였다. 내가 결승 홈런을 치기는 했지만 최동원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겼겠는가?”
한국시리즈 MVP 부상으로 맵시나 자동차를 받았다. 타고 다니던 맵시나는 처분했다. 세금 120만원을 내고 새 차를 몰았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많은 홈런을 쳤지만 그건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가끔 한전에 남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한다. 스물일곱 살에 프로에 왔다. 한전에 있었다면 평탄했을 인생이기에 ‘만약에’라는 생각도 하지만 그 홈런이 있었기에 후회는 없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