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김용수 “8회 1사 만루 병살…평생 못 잊어”

입력 2012-11-0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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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는 통산 2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 때마다 MVP는 그의 차지였다. 김용수는 LG의 전성기 선발과 마무리로 전천후 활약을 펼치며 마운드를 지켰다. 20년 가까이 우승에 목마른 LG 팬들에게 김용수라는 존재는 전설이자, 향수다.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seven7sola

LG 트윈스 영구결번 No.41
늘 푸른 소나무 ‘노송’

마운드서 머리속 하얘져…풀카운트 접전 승부
내 인생의 공…그렇게 두 번째 KS MVP 올라
“야구, 그리고 유니폼에 끌린다” 다시 연수 준비


30여년의 우리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공을 잘 때리는’ 투수였다. 체격은 작았지만, 포수의 무릎 언저리에서 노는 컨트롤은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했다. ‘역대 최고의 컨트롤 투수냐’는 질문에 “빙그레 이상군이 더 좋았다. 고(故) 최동원과 함께 세 손가락에는 들 것 같다”고 스스로 답했다. 1990년과 1994년, LG의 2차례 우승 때 모두 한국시리즈(KS) 최우수선수(MVP)를 차지했다. 통산 126승(67구원승)89패227세이브를 기록했다. 1831.2이닝 동안 서울의 팀 MBC·LG를 위해 혼을 다한 피칭으로 헌신했던 그를 사람들은 노송(老松)이라고 불렀다. 선산을 지키는 늙은 소나무. LG의 영구결번(41번)스타 김용수(52)다.


○우연히 던진 공 하나가 인생을 바꿨다!

타고난 투수였다. 야구를 시작하면서부터 투수였다. 동대문중 2학년 때 처음 야구를 만났다. 선배들이 번트훈련을 하면 공을 주워 건네주는 것부터 했다. 심심해서 공을 던진 것이 계기였다. 선배의 글러브로 정확하게 공이 갔다. 던지는 공마다 스트라이크였다. 이정엽 감독이 가능성을 봤다. 1년간 중심이동을 가르쳤다. 제자리에서 두 발을 넓게 벌리고 공을 던지는 훈련. 김용수가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 절대로 잊지 않았던 투수의 기본이었다.

동대문상고∼중앙대를 거쳤다. 1982년 프로야구가 생겼지만, 실업야구 한일은행을 택했다. “군대를 해결하고 간다는 생각이었다. 1983년 제12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잠실에서 열렸다. 5개국이 참가한 대회에서 일본, 대만과 공동 1위를 했다. 그래서 군 면제가 됐다.” 김용수는 4경기에서 14이닝을 던지며 방어율 0.64로 최우수투수상을 받았다.

1985년 MBC 유니폼을 입었다. 계약금 2300만원, 연봉 1200만원. 서울 도곡동의 진달래아파트 20평짜리를 샀다. 3400만원이었다. 데뷔 첫 경기는 6월 1일 인천 삼미전. 구원 등판해 5.2이닝 6안타(1홈런 포함)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그 시즌의 유일한 승리였다. 6경기에서 1승2패2세이브. 6월 1일 등판에는 사연이 있다. 발단은 선동열이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한국화장품에 입단한 선동열은 3월 16일 한전과의 실업야구 개막전에 등판한 뒤 해태와 입단계약을 맺었다. 화가 난 대한야구협회는 선동열, 민문식(빙그레), 김용수를 상대로 프로경기 출전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이후 화해했다. 그 결과 선동열은 7월 이후, 김용수는 6월 이후 프로 데뷔가 가능해졌다.


○1986년 마무리투수가 되다!

1986년 MBC는 일본프로야구에서 코치를 영입했다. 미즈타니(水谷), 사실상 감독이었다. 스프링캠프 때 김용수를 마무리투수로 쓴다는 얘기가 돌았다. 정작 시즌에 들어가자 선발로 기용됐다. 미즈타니 코치를 찾아갔다. “확실하게 내 보직을 알려달라.”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1주일 뒤 마무리투수라는 답이 왔다. 당시만 해도 마무리투수에 대한 정확한 개념도 없었다. 삼성 권영호, OB 윤석환이 전문적으로 활동하던 때였다. 나가면 3이닝은 기본으로 던졌다. “그렇게 던졌기 때문에 1990년 선발로 전환해서도 무리 없이 던졌다. 요즘처럼 1이닝씩만 던졌다면 선발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1986년 추석. MBC 선수들은 눈앞에서 큰 돈을 놓쳤다. 플레이오프(PO) 진출이 유력했다. MBC와 OB가 PO 티켓 남은 한 장을 다투고 있었다. MBC는 전주에서 해태와 1승1패를 했다. 먼저 경기를 끝낸 뒤 잠실 롯데-OB전 결과를 지켜봤다. 롯데가 이기면 MBC가 PO에 진출하는 순간. 롯데 투수는 3년 연속 20승을 노리던 최동원이었다. 롯데가 앞섰다. 매니저가 007가방에 든 돈을 보여주며 기뻐했다. PO 진출 보너스였다. 그 돈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며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비극적 소식이 기다렸다. OB가 김형석의 홈런과 신경식의 3루타로 역전했다. “그 한 방이 MBC의 운명을 바꿨다. 그 후 MBC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우승 한번 못해보고 은퇴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1990·1994년 KS MVP가 되다!

1990년 LG는 뜻밖에도 우승을 했다. 김용수는 전반기에 마무리로 부진했다. 후반기 들자 백인천 감독은 김용수와 정삼흠의 보직을 바꿨다. 선발로 나서 후반기에만 10승을 거뒀다. 삼성과의 KS 1차전 선발도 그의 몫이었다. “김태원이 그해 18승을 했다. 성적으로 보면 김태원이 1차전에 나가야 했다. 춘천에서 한국시리즈 대비 훈련을 할 때 백인천 감독이 따로 불러 ‘네가 1·4차전에 나간다’고 했다.” LG는 일방적으로 삼성을 누르고 우승했다. 1·4차전 승리투수 김용수는 MVP가 됐다.

1994년 LG는 KS에서 태평양을 4승무패로 꺾고 또 우승했다. 김용수는 마무리로 나서 1승2세이브를 올렸다. “2번의 우승 가운데 1994년이 더 기뻤다. 1차전에서 구원승을 거둔 것이 가장 기억난다. 1-1인 8회 1사 만루서 등판해 김동기를 3루 병살로 잡았다. 마운드에 섰는데 머리가 하얗게 됐다. 어떻게 타자를 상대해야 할지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지자 머리에 생각이 돌아왔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뒤 유인구를 던졌다. 김동기가 속지 않았다. 풀카운트서 8구째 백도어 슬라이더를 던졌다. 3루 병살이었다. 절대로 잊지 못할 내 인생의 공이다.”


○2000년 예상 못한 은퇴, 그리고 지도자 김용수

2000년 7월 이광은 감독이 불렀다. “지금부터 선발 자리를 후배에게 준다”고 했다. 중간계투가 됐다. 두산과의 PO. 김용수는 마지막 피칭을 했다. 두산 타자들이 김용수의 공을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나 새 소방수 장문석에게 마운드를 넘기자 사단이 났다. 심정수 안경현의 홈런으로 LG는 KS 진출 티켓을 놓쳤다. 시즌 뒤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준비 없는 은퇴였다. 은퇴경기나 은퇴식도 없었다.

2002년부터 3년간 투수코치를 했다. 2년간 방송해설도 했다. 그는 “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왜’다. 미국에서 연수하면서 배운 것이 그것이었다. 선수들에게 어떤 것을 하면 무엇이 좋아지는지, 왜 해야 하는지, 논리적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선수의 폼을 고쳐서는 안 된다. 선수가 그 폼을 가진 데는 이유가 있다. 고치다 잘못되면 평생을 책임져야 한다. 수정보다는 폼의 보강이다. 공을 놓는 순간부터 폴로스루까지 스윙스피드를 늦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마지막 순간이 홈플레이트에서의 운명을 좌우한다. 단거리선수가 피니시 라인을 지나가게 뛰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스피드보다는 컨트롤이다”고 강조했다.

최근까지 모교 중앙대 감독으로 야구현장에 있었지만 또 한 번의 연수를 준비하고 있다. 아직 배워야 할 야구의 길이 많기에 내린 결단이다. “유니폼을 입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내가 가야할 곳이 그라운드인데 가지 못해 좌절하고 남몰래 눈물 흘린 적도 있다. 그래서 더욱 야구에 대해 열정이 생겼다. 야구가 자꾸 끌린다.”


김용수는?

▲생년월일=1960년 5월 2일
▲출신교=동대문중∼동대문상고∼중앙대
▲실업 경력=한일은행(1983년)
▲프로경력=MBC(1985년)∼LG(1990년)
▲프로통산 성적=16시즌 613경기 126승89패227세이브 방어율 2.98
▲수상 경력=다승 1위(1998년 18승), 구원 1위(1986년 35세이브포인트·1987년 33세이브포인트·1989년 26세이브포인트), 승률 1위(1998년 0.750)
▲지도자 경력=2002년 LG 코치, 2010년 중앙대 감독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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