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People]윤혜숙 “혜바라기 남편 덕에…끝났다던 내가 살아났다”

입력 2013-03-1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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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는 윤혜숙을 그저 무서운 언니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오해다. 후배들에게 윤혜숙은 처진 팀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든든한 맏언니다. 윤혜숙이 포인트를 올린 뒤 환호하고 있다. 사진제공|IBK기업은행

밖에서는 윤혜숙을 그저 무서운 언니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오해다. 후배들에게 윤혜숙은 처진 팀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든든한 맏언니다. 윤혜숙이 포인트를 올린 뒤 환호하고 있다. 사진제공|IBK기업은행

■ V리그 정규리그 우승 기업은행 주부선수 윤혜숙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에서 주부선수는 3명 있다. IBK기업은행의 윤혜숙(30)은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시즌 내내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특수한 직업의 주부. 지난 시즌 현대건설에서 방출된 뒤 배구를 포기할 뻔 했던 위기도 있었지만 새로운 팀에서 정규리그 1위의 감격을 맛봤다. 그에게 배구는 어떤 존재일까.


결혼 후 현대건설 유니폼 벗고 절망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기업은행에 먼저 전화해 다시 코트로

남편 ‘산삼 외조’ 등 묵묵한 뒷바라지
시어머니도 전폭지원…경기장서 펄펄
아직 2세보단 오랜친구 배구가 좋아

이제 서른…힘 떨어져도 시야 넓어져
내가 좀 무서운 언니? 장난도 잘 쳐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다

2011∼2012시즌이 끝난 뒤였다. 10년간 유니폼을 입었던 현대건설을 떠났다. 이별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왜 자신이 나가야 하는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섭섭했다. 숙소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대로는 끝내고 싶지 않았다. 평소 친하던 이효희 언니가 생각났다. 연락을 했다. 그는 “계속 배구를 하고 싶다. 기업은행에서 뛰고 싶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효희는 “고맙다. 감독님에게 얘기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해서 2012∼2013시즌을 앞두고 기업은행 선수가 됐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창단 1년을 갓 넘긴 팀답게 기업은행은 여기저기 모자란 것이 많았다.

“현대건설에서는 훈련시설도 숙소도 운동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하고 마음을 비웠다. 이전 팀하고 비교하면 안 되지만 부딪치는 것이 많았다. 대신 모자란 것을 채워가는 기쁨도 있었다.”

동료들은 편했다. 국가대표로 함께 뛰었던 김희진 박정아가 있었다. 동갑내기 남지연도 GS에서 왔다. 부족한 것이 많았기에 기업은행 선수들의 목표의식은 확실했다. 윤혜숙의 마음가짐도 달랐다. 남지연과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성적을 내야한다.”


○윤혜숙에 대한 오해 그리고 진실

경기 때 후배들에게 많은 얘기를 한다. 어릴 때부터 지는 것이 싫었다. 이정철 감독은 “강한 승부욕이 선수로서는 도움이 되지만 지나치면 다른 선수에게 부담이 된다. 지금 네가 필요한 것은 후배들에 대한 배려”라고 했다. 혼도 내고 때로는 달래가면서 후배들을 이끌었다. 배구는 참 묘한 운동이었다. 힘도 기량도 필요하지만 센스도 머리도 필요한, 그래서 하면 할수록 어려운 운동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힘은 떨어졌지만 시야는 넓어졌다. 고비에서 후배들이 길을 찾지 못하고 머리가 멍해지는 순간마다 나섰다. 그러다보니 경기장 밖에 있는 사람은 윤혜숙을 무서운 언니로 안다. 그런 오해에 속상할 때도 많다. “남들이 나를 보면 화만 내는 줄 안다. 운동할 때는 집중, 긴장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후배들과 장난도 잘 친다. 팀 분위기는 우리가 가장 좋을 것이다.”


○운명으로 다가온 배구

중학교 1학년 때 본격적으로 배구를 했다. 어릴 때부터 운동이 좋았다. 공부는 싫었다. 잘 달렸다. 초등학교 때 남자들과 축구를 하며 놀았다. 처음 육상을 택했다. 남성여중 육상부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때 배구부에서 제의가 왔다. 아버지도 “육상보다는 배구가 좋겠다”고 했다. 어머니와 친척들은 반대했다.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힘든 운동을 시키다니.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딸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라고 했다. 강하게 키웠다. 세터로 시작했다. 팀 사정에 따라 공격수도 했다. 남성여고 시절 선배 김세영 등과 우승도 많이 했다. 2002년 12월11일 현대건설에 입단했다. 2라운드 1순위. 계약금 1억1000만원을 받았다. 부모님께 다 드렸다. 그동안 배구로 돈도 꽤 벌었다. 부모님께 집도 사드렸다. 물론 선수생활이 좋을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전으로 뛰다가 외국인 선수가 오면서 비주전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리베로로 뛴 적도 있었다. 부침은 있었지만 ‘내 운동만 오래 하다보면 기회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꾸준히 했다.


○아! 아버지

월남전 참전용사였다. 후두암에 걸렸다. 고엽제 후유증. 2006년이었다. 그때 가장 힘들었다. 몇 번씩 위기가 왔다.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훈련을 중단하고 병원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숙소에서 홀로 많이 울었다. 아버지는 오래 버텼다. 딸의 경기가 큰 위안이 됐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5년이나 투병했다. 윤혜숙의 경기가 있던 날이면 아버지가 입원한 병실의 모든 환자들은 그 경기를 함께 봤다. 딸이 이기면 아버지는 음료수를 돌리며 좋아했다. 쉬는 날마다 병실을 찾았다.

“환자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고 배웠다. 그들에 비하면 내 운동은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어려울 때 남편을 만났다. 내가 혼자 짊어졌던 짐을 남편이 덜어줬다. 그래서 고맙다.”

아버지는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기업은행 유니폼을 입고 베트남에서 경기를 하던 중이었다. 원정 도중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위독하다는 전화였다. 그리고 이틀 뒤, 경기 직전에 전화가 울렸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떠나보낼 줄은 몰랐다. 임종을 못했다. 운동하면서 가장 슬픈 날이었다. 대한민국 군인 고(故) 윤영묵 씨는 향년 67세를 일기로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윤혜숙과 시어머니가 다정한 포즈를취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IBK기업은행

윤혜숙과 시어머니가 다정한 포즈를취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IBK기업은행



○남편과 시댁

휴가 가서 우연히 만났다. 마음이 통했다. 연애를 시작했다. 1년을 사귄 끝에 2010년 6월12일 결혼식을 올렸다. 숙소생활을 하는 운동선수에게 연애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만나는 날은 드물었다. 10살 연상의 남편은 울산에서 힘들게 숙소 부근으로 올라와서 만나고 갔다. 대신 영상통화를 자주 했다. 연애기간동안 항상 좋을 리는 없었다. 그래도 훈련이나 경기 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일과 사랑은 별개라고 믿었다.

처음 시댁에 인사를 갔다.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결혼할 상대가 있다고 하자 믿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것도 운동선수라니. 시어머니는 처음 만나던 날 아들의 말을 믿었다. 좋아하셨다. “네가 원하는 만큼 운동을 하라”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셨다.

지난 시즌 남편은 단 2경기만 빼고 모든 경기를 찾아와 응원했다. 귀한 산삼도 구해줬다. 얼마 전에는 선수단 숙소로 꼼장어도 보내줬다. 동료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시어머니도 휴가 때 집에 가면 며느리가 좋아하는 음식만 해주신다. 숙소에서 오래 지내다 가끔 집에 가면 편하기는 하지만 외로울 때도 있다. 주위에 시끌벅적 재잘거리던 후배 동료들이 없어서다. 지난해 남편을 위해 처음 생일상을 차렸다. 맛있다고 했다. 언젠가 선수생활이 끝나면 남편을 위해 내조를 잘 할 자신이 있다.


○윤혜숙에게 4번째 챔피언 결정전은?

남편 나이를 생각해 2세도 빨리 가져야겠지만 아직은 배구가 좋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 해온 오랜 친구 같다. 2일 현대건설을 꺾고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던 날 정말 기뻤다. 장소가 수원이고 상대가 현대건설이어서 더욱 그랬다. 아직은 쓸만하다는 것을 보여줘 저절로 춤이 나왔다. 절대 잊지 못할 경기다. 이제 챔피언결정전을 한다. 벌써 4번째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운명의 승부. 집중력 컨디션 운(運) 등 모든 것이 맞아야 한다. 어린 선수들에게 자신이 가진 노하우를 몸으로 보여주면서 앞서야 할 때다. 주부선수 윤혜숙에게 서른 번째 봄은 그렇게 오고 있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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