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져야할 선수 기본권 무시하는 독소조항

입력 2013-07-1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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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던 이적의 희생양이 된 김기희(24)가 결국 전북 현대 유니폼을 입는다.

전북은 9일 김기희 영입을 공식 발표했다. 정상적인 절차를 거친 이적이 아니다. 원래 대구FC 소속인 김기희는 작년 9월, 카타르 알사일리아로 9개월간 임대를 갔다. 임대 만료 시점인 6월 말, 김기희는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대구가 올 1월 자신도 모르게 전북과 이적합의를 해버린 것이다. 전북은 10억 이상 이적료를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희 본인과 대리인도 까맣게 몰랐던 일이었다. 다른 리그 이적이나 원 소속 팀 복귀 등 여러 가능성을 놓고 저울질하던 김기희는 발끈했다. 전북으로 절대 안 가겠다고 버텼다. 국제축구연맹(FIFA) 제소까지 생각하고 법률가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창창한 선수인생을 감안해 쉽지 않은 싸움이다”는 주변의 만류에 결국 마음을 접었다.


● 법적으로 문제되는 조항

A라는 회사에 멀쩡히 잘 다니고 있었는데, 아무런 사전 설명 없이 하루아침에 B로 옮기라는 통보를 받는다면? B회사가 A에 비해 많은 연봉을 준다한들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K리그에서는 이번 김기희와 같은 비상식적인 일이 종종 벌어진다.

프로연맹의 독소조항 때문이다. 연맹 규정 5장 33조는 ①각 구단은 보유하고 있는 소속 선수를 타 구단에 양도(임대 또는 이적)할 수 있다. ②선수는 원 소속 구단에서의 계약조건보다 더 좋은 조건(기본급 연액과 연봉 중 어느 한 쪽이라도 좋은 조건)으로 이적될 경우 이를 거부할 수 없다. ③선수가 이적을 거부하면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이적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선수 동의 없이 이적시키는 경우는 없다. 이 조항은 K리그에서만 볼 수 있는 이른바 로컬룰이다.



물론 유럽 규정이 능사는 아니다. 한국 실정에 맞는 로컬룰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 조항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잣대는 국제룰이냐 로컬룰이냐가 아니다. 독소조항이 선수의 기본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축구협회 법무실장인 이중재 변호사는 “선수를 보내려는 구단, 데리고 가려는 구단 그리고 선수 당사자 등 3자가 모두 합의해야 계약의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연맹은 기본적인 원리에 반하는 내용을 규정으로 두고 있다”고 말했다.


● 이기주의, 수수방관의 결과물

2005년, 구단 이기주의와 연맹의 수수방관이 합쳐져 독소조항이 탄생했다.

연맹 규정을 만들거나 고치려면 이사회를 거쳐야 한다. 2005년에는 이사회 멤버가 각 구단 단장들이었다. 위헌 소지가 있는데다 철저하게 구단에만 유리한 규정이 버젓이 만들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축구 관계자는 “K리그 실정이 얼마나 절박하면 이런 규정이 생겼겠느냐”고 항변했다. 여기서 절박함이란 구단의 재정 문제를 뜻한다. 특히 도시민구단의 열악한 상황과 맞닿아 있다.

K리그는 드래프트를 통해 신인선수가 입단하면 3~5년 계약을 맺는다. 최초 계약기간인 3~5년이 지나면 자유계약선수(FA)가 된다. 이적료 없이 팀을 옮길 수 있다. 구단 관계자들은 “신인선수의 경우 3년 정도 지나면 즉시 전력 감으로 성장하는데 쓸만해지면 공짜로 풀어줘야 한다”고 하소연한다. 방법은 있다. 만료 전 재계약을 하면 된다. 하지만 프로에서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은 선수들 상당수는 여건이 더 나은 팀이나 해외로 옮기기 위해 재계약을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독소조항이 위력을 발휘한다. 구단은 선수의 생각은 무시한 채 최대한 이적료를 많이 챙겨주는 구단으로 보내버리면 끝이다. 거액의 이적료를 지불할 수 있는 기업구단이 선수를 데려가는 경우가 많다. 시민구단은 시민구단대로 이적료를 챙길 수 있고, 기업구단은 기업구단대로 이적료만 지불하면 선수 의사와 상관없이 무조건 영입이 가능하다는 각각의 이점이 있다. 독소조항을 활용해 양자가 비겁한 거래를 하는 셈이다.


● 연맹이 나서야 한다

독소조항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규정을 손보려면 구단 사무국장과 연맹 실무자가 참여하는 실무위원회나 제도개선위원회에서 논의를 한 뒤 합의를 통해 이사회에 상정해야 한다. 그러나 구단들이 자신들에게 적지 않은 이득을 안겨주는 이 규정을 쉽게 포기할 리 없다.

다만 이 규정이 처음 생겼던 2005년과 지금 이사회는 구성원이 크게 바뀌었다. 현재 K리그 이사는 연맹 2명(총재, 사무총장), 협회 1명(전무이사), K리그 클래식(1부 리그) 단장 5명, K리그 챌린지(2부 리그) 단장 1명, 사외이사 3명 등 12명이다. 연맹이 의지만 갖는다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 충분히 이사회에서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연맹은 독소조항의 문제점을 충분히 인지하고도 구단 눈치만 보고 있다. 스포츠동아는 그 동안 여러 차례 이 조항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K리그가 30돌을 맞은 상황에서 이런 전근대적인 조항은 손봐야 한다는 주장도 했지만 연맹은 나서지 않고 있다.

김기희에 대한 기사가 나간 뒤 몇몇 프로 감독들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 선수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문의를 해왔다. 모 감독은 “선수들이 찾아와 ‘감독님 진짜 이런 잘못된 조항은 축구발전을 위해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토로하더라. 부끄러웠다”고 했다. K리그 선수들이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자각하고 이번 사건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K리그 등록선수는 클래식 497명, 챌린지 252명(7월5일 기준)이다. 749명의 눈이 연맹을 지켜보고 있다.

윤태석 기자 sportic@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Bergkamp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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