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기획] 남자의 힐링…겨울 캠핑, 그 황량함에 녹아들다

입력 2014-01-17 07: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인천 신도|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 @seven7sola

■ 캠핑마니아 세 남자와 함께 한 인천 신도 캠핑

사업실패후 살기 위해 캠핑을 택한 유씨
아이들 덕에 캠핑…인생 맛을 느낀 이씨
일상에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 나선 김씨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 속 사내들의 힐링

이제 다시 살아야겠다,
내 꿈의 엔진이 꺼지기 전에…


아직 보이지도 않는 꿈들을 우린 만나게 될까/누구도 알 순 없겠지.
아이는 꿈을 좇아 어른이 되고 조금씩 잊혀져가지/우리가 떠나온 그 곳.
내 꿈의 엔진이 꺼지기 전에, 식어 버리기 전에.
이제는 만나고 싶어/다른 내일을.
(뮤지컬 ‘오디션’ 중 ‘내 꿈의 엔진이 꺼지기 전에’)

혈관마저 얼려버릴 것 같은 추위, 손톱 조각 같은 틈만 허용해도 사정없이 파고드는 바람, 눈이 삼켜버린 자연의 민낯. 어쩌면 겨울은 여행에 적합하지 않은 계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떠난다, 이 악조건을 뚫고. 가마니만한 배낭 속엔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채우고, 납덩이같은 침낭과 텐트를 배낭 위에 얹고, 황량한 산으로 들판으로 섬으로 홀연히 떠난다. 그들은 왜 겨울에 등짐을 메고 떠나는 것일까.

겨울캠핑은 ‘수컷’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남자들은 ‘최악의 조건’과 맨몸으로 부딪치며 잊었던 사내의 본성을 발견하게 된다.

1월의 추운 겨울 어느 날. 세 남자가 짐을 꾸렸다. 목적지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신도리. 인천 삼목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0여 분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섬이다.


●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 … 더치오븐에선 통닭이 익어가고

40여 분 만에 네 동의 텐트가 구축됐다. 바람이 불자 텐트들이 쿨럭쿨럭 기침을 해댔다. 유승화(44·사업) 씨가 기자에게 에어매트를 내밀었다. 밤에 잘 때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로부터 몸을 지켜 줄 소중한 장비다. 유씨가 가르쳐 준 대로 두 손바닥을 대고 한참을 눌러댔다. 마치 누군가에게 인공호흡을 가하는 기분이다. 바람은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다. 유 씨가 웃으며 “불편함을 즐기는 것이 캠핑”이라고 했다.

유 씨가 주전자를 버너 위에 올려놓고는 커피원두를 작은 분쇄기에 넣어 갈았다. 동행한 이찬영(44·회사원) 씨가 스마트폰에 연결한 스피커에서는 김광석의 ‘변해가네’가 흘러나왔다. 세상은 너무 쉽게 변해갈지 몰라도, 이곳의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다. 바다에 걸렸던 해는 야속하게 뚝 떨어졌다. 사위는 어둠뿐이었다.

유 씨가 꽈리처럼 생긴 등을 켰다. 멀리 영종도의 불빛만이 도시의 존재를 알려줬다. 배로 10여분이면 닿을 곳이지만 어쩐지 낯선 땅, 이국처럼 느껴졌다.

옹기종기 불 앞으로 모여든다. 유 씨가 숯불 몇 개를 들었다. 이 숯불로는 고기를 굽는다. 고기를 구워 식사를 하는 동안 나머지 숯불 위에 올려둔 더치오븐에선 로스트치킨이 몸부림치고 있을 것이다.

(맨 위로부터 시계방향) 캠핑에서 먹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숯불에 구운 고기 한 점 입에 넣으면 술이 술술 들어간다. 식후 즉석에서 간 원두로 끓인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는 일행들. 마지막 사진은 캠핑요리의 ‘종결자’ 더치오븐 로스트치킨.



● 밤새 장작을 때며 얻은 깨달음 “다시 살아야겠다”

소주가 몇 순배 돌자 분위기가 먹먹해졌다. 스토브의 빨간 불빛이 사내들의 얼굴에 수염자국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얼어붙었던 몸과 함께 마음 한 구석이 녹아내린다. 고요를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이 씨였다.

한때 유명 수입브랜드의 신발매장 사장이었던 이 씨는 자신의 인생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사장은 겉만 번드르르 했지 힘든 정신노동이었다”고 회고했다. 하루 종일 무릎 꿇고 사람들의 신발을 신겨주다 보면 자존감은 깊은 나락 속으로 가라앉았다. 결국 폭발할 지경에 다다랐다. 삶의 전환점을 찍게 해 준 건 겨울여행이었다며 씨∼익 웃었다.

유 씨와 이 씨는 학교 동급생인 아이들 덕에 만났다. 가족끼리 처음으로 강원도 횡성군의 한 예술촌으로 캠핑을 떠났다. 그때도 겨울이었다. 이 씨는 이날 처음으로 모닥불에 장작을 지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또렷하게 기억하진 못했다. 밤부터 새벽까지 그는 가족들 앞에서 혼자 말없이 불 속에 장작을 밀어 넣고 또 밀어 넣었다. 아이가 “아빠, 왜 그래”하고 물었다.

유 씨는 “그날 이 씨가 땐 장작이 200kg쯤 된다. 아마 50만원어치가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리지 않았다.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라며 이 씨의 어깨를 툭 쳤다.

밤하늘을 향해 널름거리는 불의 혀를 보며 그는 결심했다. 나를 찾을 수 있는, 내게 맞는 일을 하자고. 겨울캠핑 후 신발매장을 접고 새로운 그의 일을 찾았다.

유 씨는 인테리어 사업을 했다. 중소기업 운영이 그렇지만 접대할 술자리가 많았다. 술과 사람과 씨름하다 병을 얻었다. 당뇨병은 이미 몸 속 깊이 들어와 있었다. 설상가상 8억원의 미수금이 발생하면서 부도를 맞았다. 벼랑 끝에 까치발을 하고 선 기분이었다.

“살기 위해 무조건 걸었다. 그리고 캠핑을 시작했다. 90kg이 나가던 체중이 4∼5개월 만에 10kg이나 빠졌다. 한 겨울,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무거운 배낭을 지고 걷다가 생각했다. 인생 뭐 있나. 한 발 한 발, 이렇게 걸으면 되는 게 아닐까.”

유 씨는 인테리어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특허를 받은 아이디어 상품이 인기를 끌며 유망한 사업가로 성장 중이다. 유 씨는 “살기 위해 시작한 캠핑이 내게 새로운 삶을 선물했다”고 말했다.


● “우리 모두는 섬인들”, 섬에서 탈출하라!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던 김준영(45·포토그래퍼)씨가 혼잣말을 하듯 “우리는 섬인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다. ‘서민시대’가 아닌 ‘섬인시대’란다. 가장은 회사와 집을, 아이들은 학교와 집, 학원을 쳇바퀴 돌 듯 돌며 살아간다. 모두가 뚝 떨어진 각자의 섬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섬에 사는 섬인이다. 그에게 캠핑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자 섬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섬을 벗어나, 또 다른 섬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김 씨는 “나는 캠핑을, 그것도 혹한의 겨울에 하는 캠핑을 사랑한다. 거칠고 잔혹한 야생에 맞서 생존의 게임에 몰두하다 보면, 섬인을 탈피해 대륙인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겨울의 밤은 느짓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숯불 위에서 이글이글 침묵이 익어간다. 모두들 가슴 속에 불 하나씩을 품고는 발그레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며 말하는 듯했다

다시 살아가고 싶다. 내 꿈의 엔진이 꺼지기 전에, 식어 버리기 전에.

인천 신도의 겨울 밤. 세 남자의 섬 사이에, 연도교(섬과 섬을 잇는 다리)가 하나씩 놓이고 있었다.

인천 신도|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ranbi361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