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통신원의 네버엔딩스토리] 66년간 메이저리그 외길인생…모두가 사랑한 ‘뽀빠이’

입력 2014-06-19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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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세로 생 마감한 돈 지머의 야구인생

선수시절 공 맞고 뇌수술…ML 헬멧도입 계기
보스턴 감독땐 연패 몰락 ‘보스턴대참사’ 굴욕
73세 코치땐 벤치클리어링 하다 패대기 당해
심장·신장 이상으로 투병하다 끝내 세상 등져
야구장의 영원한 뽀빠이, 팬들 가슴속에…

‘뽀빠이’라는 애칭으로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돈 지머 전 감독이 지난 5일 별세했다. 1949년 메이저리그와 인연을 맺은 그는 66년 동안 한결같이 그라운드를 지켰던 인물이다. 오늘날 타자들이 헬멧을 쓰고 경기에 나서게 된 것은 그의 덕분이다. 마이너리그 시절이던 1953년 상대 투수가 던진 공에 머리를 맞은 지머는 2주 동안 의식을 잃고 뇌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메이저리그는 헬멧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선수시절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해내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던 그는 은퇴 후에도 감독뿐만 아니라 최고령 코치로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15세 때 만난 아내와 근 70년을 함께 한 의리 있는 남자, 지머의 야구인생을 조명한다.

● 떠돌이 인생

오하이오주 신시내티가 고향인 지머는 1949년부터 브루클린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빅리그로 승격되기까지는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저스(1954∼1959년, 1963년)를 시작으로 시카고 컵스(1960∼1961년), 뉴욕 메츠(1962년), 신시내티 레즈(1962년), 워싱턴 세너터스(1963∼1965년)에서 12년간 메이저리거로 활약했다.

통산성적은 타율 0.235, 91홈런, 352타점으로 특출 난 성적은 아니지만 1961년 내셔널리그 올스타로 선정됐고, 다저스 소속으로 두 차례(1955·1959년)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메이저리그 기록인 120패를 당한 메츠의 창단 멤버이기도 했다.

1966년에는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해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니혼햄 파이터스)에서 백인천과 한솥밥을 먹었다. 한 해 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신시내티 산하 더블A와 트리플A 팀에서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하다 1967년 은퇴했다.


● 보스턴 대참사

1971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3루 코치를 맡은 그는 이듬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이적했다. 시즌 개막 후 불과 11경기 만에 프레스턴 고메스 감독이 해임되자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사령탑을 맡았다. 1973년 시즌을 마치고 해임된 뒤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다시 3루 코치로 발탁됐다. 그에게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은 1975년 월드시리즈 6차전이었다. 6-6으로 동점을 이룬 9회말 레드삭스는 무사 만루의 기회를 잡았다. 프레드 린이 친 뜬공이 신시내티의 좌익수 조지 포스터에게 잡혔다. 득점을 올리기에는 무리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3루 주자 데니 도일이 홈으로 쇄도하다 태그아웃 당했다. 3루 코치 지머가 “No! No! No!”라고 외친 것을 “Go! Go! Go!”로 잘못 알아들어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결국 무사 만루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 레드삭스는 연장 12회말 칼튼 피스크의 끝내기 홈런에 힘입어 7-6으로 승리하고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지만 7차전에서 3-4로 무릎을 꿇어 우승은 레즈의 차지가 됐다.

1976년 레드삭스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5할 승률을 넘겼고, 이후 3년 연속 90승 이상을 거뒀다. 특히 99승을 올린 1978년은 레드삭스 팬들에게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해였다. 한때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14경기차로 앞서며 선두를 질주했지만 8월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9월말 4경기차로 앞선 상황에서 라이벌 뉴욕 양키스와의 4연전을 모두 패해 결국 10월 3일 단판승부로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러 또 다시 무릎을 꿇었다. 아직까지도 많은 팬들은 이를 두고 ‘보스턴 대참사’라 부르고 있다.


● 뽀빠이 도와줘요

레드삭스 감독직을 물러나자마자 지머는 1981년 텍사스 레인저스로 둥지를 옮겼다. 하지만 2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특별한 사유 없이 에디 찰리 구단주에게 해고를 당했다. 그런데 해임 당할 때마다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는 구단이 늘 있었다. 감독을 지냈지만 코치직도 마다하지 않고 뉴욕 양키스(1983·1986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1987년), 시카고 컵스(1984∼1986년)에서 활약했다. 컵스에서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지휘봉을 잡은 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감독을 맡은 기간이었다. 특히 1989년에는 지구 우승을 차지하며 내셔널리그 최우수 감독상도 받았다. 1992년 보스턴 레드삭스로 돌아가 코치를 맡은 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신생팀 콜로라도 로키스의 코칭스태프로서 오랜 노하우를 전수했다.


● 조 토리 감독의 오른팔

1996년 뉴욕 양키스의 사령탑을 맡은 조 토리 감독은 지머에게 “벤치코치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두 환상의 콤비가 힘을 합치자마자 양키스는 5년 동안 무려 4차례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99년에는 시즌 도중 토리 감독이 전립선암 수술로 자리를 비우자 감독 대행을 맡아 21승15패의 성적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도 많은 팬들에게 회자되는 사건은 2003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벌어진 페드로 마르티네스와의 충돌이다. 빈볼 시비로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난 가운데 당시 72세인 지머 코치가 분을 참지 못하고 마르티네스를 향해 돌진을 한 것. 순간 마르티네스는 매정하게도 아버지뻘인 지머 코치를 땅바닥에 패대기쳐 큰 물의를 일으켰다.

현역시절 빈볼에 맞아 수술을 여러 차례 받았던 그는 척 노블락의 날카로운 파울 타구에 맞는 아찔한 순간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다음날 경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육군 헬멧을 쓰고 나와 팬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2003년까지 토리 감독의 오른팔을 자처했던 그는 이듬해부터 탬파베이 레이스로 둥지를 옮겨 시니어 어드바이저로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끊임없이 팀을 위해 헌신했다. 레이스에서 그의 등번호는 매년 변했다. 프로야구와 인연을 맺은 기간에 해당하는 등번호를 새겨 넣는 것으로 올해는 66번을 달았다.

1949년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야구 외에는 다른 곳에서 월급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지머 전 감독은 심장과 신장에 이상이 생겨 투병 생활을 하다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많은 팬들의 기억 속에 ‘야구장의 뽀바이’ 지머 전 감독이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오랫동안 남게 될 것이다.

손건영 스포츠동아 미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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