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체험 Whatever] 왕년의 뚝방 레이서, 35도 경사 코너 돌다 등골이 오싹∼

입력 2014-07-01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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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재학 기자(왼쪽)가 ‘사부’ 김경남 선수와 함께 피스타 코너 진입로를 달리고 있다. 긴장과 여유만만, 두 사람의 표정에서 초보와 전문가의 차이가 드러난다. 2. “힘 빼세요.” 사부가 김 기자의 롤러 라이딩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다. 3. 경륜 경주 스타트를 체험중인 김 기자. 출발 총성과 함께 사이클 고정 장치가 풀리면 선수들은 허리반동을 이용해 주행을 시작한다. 4. 라이딩 도중 펑크가 난 픽시 뒷바퀴. 광명|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

■ 경륜장 ‘벨로드롬’ 직접 타보니…

춤추는 자전거…롤러 훈련부터 중심잡기 힘들어
벨로드롬 체험…35도 경사 브레이크 없이 돌아
코너에선 30km이상 속도내야 낙차 피할 수 있어
피스타 한바퀴 선수들과 10초 차…과욕에 펑크

마을에서 읍내까지는 십리. 아직 버스가 다니기 전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갈 무렵 모두가 자전거를 배웠다. 프레임 사이로 다리를 끼워 페달을 밟는 ‘깽깽이’를 타다, 어느 순간 훌쩍 안장 위에 올라앉았다. 토요일 하굣길 뚝방에서는 자전거 경주가 열리곤 했다. 가끔은 마을 대항전이 벌어졌는데, 그때는 어김없이 돈이 걸렸다. 그렇게 자전거와 성장기를 보낸 소년은 30년 후 프로 자전거 레이스를 취재하는 기자가 되었다.


● 경륜기자, 벨로드롬 체험에 나서다

“자전거는 탈줄 아세요?”

인터뷰 하던 경륜선수가 거꾸로 기자에게 취재하듯 물었다.

“여덟 살 때부터 짐차로 논두렁을 달렸던 사람입니다.”

뚝방 레이스에서 마을의 에이스로 날렸다는 무용담을 들려주려는 찰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벨로드롬은 못타봤죠? 일반 도로와는 차원이 다른데.” 경륜장 피스타(주로)는 한 번 타봐야 제대로 된 기사를 쓸 수 있지 않겠냐는 메시지였다. 잠자던 ‘라이더의 본능’이 꿈틀 깨어났다.

한국경륜선수회 김영만(44)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로드롬 라이딩 체험을 하고 싶다고 하자 “위험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라며 걱정 어린 목소리를 건넸다. ‘문제없다’는 대답에, 미심쩍은지 전담 코치를 붙여주겠다고 했다.

6월25일 광명스피돔. 3만명 수용 규모의 세계 최대 돔경륜장이자 기자의 체험현장이다. 김 회장과 함께 특별 초빙된 1일 강사가 기자를 맞았다. 19년차 베테랑 경륜선수이자 동호인 지도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김경남(46) 선수. “각오는 돼 있죠.” ‘싸부’의 첫 인사가 살벌했다.


● 롤러 주행, 사이클은 갈팡질팡 춤을 추고

김 회장이 자신이 현역시절 입던 거라며 가져다 준 쫄쫄이 하의, 입고 보니 검은색 바탕에 빨간색 줄무늬가 선명하다. 상위 등급인 특선급 선수용이었다. 준비된 저지(Jersey· 상의)는 한 발 더 나갔다. 대상경주(성적 상위선수들이 출전하는 토너먼트 대회) 우승자가 입는 ‘챔피언 저지’였다. 태극1장도 못 뗀 태권도 초보가 검은 띠를 맨 격이었다.

첫 체험은 자전거 롤러 훈련. 드럼에 바퀴를 올리고 페달을 밟으면 제자리 라이딩이 가능해 순발력과 지구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 선수들은 실전이나 훈련에 앞서 몸을 풀기 위해 롤러를 탄다고 했다. 페달을 밟자 롤러 위 자전거가 춤을 춘다. 지그재그로 흔들리는 바퀴. 중심을 잡고 일직선으로 달리기가 쉽지 않다. 보다 못한 사부가 자세를 교정해 준다. “상체에 힘을 빼세요. 핸들에 살짝 손을 얹는다는 기분으로.”

선수들은 보통 40여 분간 롤러를 탄 후 피스타로 들어서지만, 속성교육이 필요한 기자는 10분 만에 끝냈다.


● 무모한 기자, 금단의 선을 넘보다

경륜장은 고대로마시대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을 연상시킨다. 2000년 전 검투사들처럼 경륜선수들도 이곳에서 관전자의 시선을 업고 살벌한 생존경쟁을 벌인다. 직접 벨로드롬에 들어서보니 관중석에서 내려다 봤을 때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일단 천천히 돌아보죠. 픽시에 적응을 해야 하니까.” 사부가 자전거를 건넸다.

경륜 선수들이 타는 자전거는 ‘픽스드 기어 바이크(Fixed Gear Bike·픽시)’, 즉 고정 기어 자전거다. 브레이크가 없는데, 정지하려면 페달을 거꾸로 돌려야 한다. 선수용 완성차 가격은 400만∼500만 원선. 이날은 픽시 초보인 기자를 배려해 브레이크가 달린 훈련용 픽시가 준비됐다.

“와∼ 높다. 저 꼭대기에서도 타볼 수 있나요.” 기자가 타원형 트랙의 코너 맨 윗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스키장 슬로프를 연상시키는 아찔한 급경사다. 사이클 경주로는 회전력을 높이고 고속 주행 때 원심력으로 튕겨져 나가는 사고를 막기 위해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직선주로의 경사는 4도, 코너 부분은 34∼35도.

사부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안전하게 스테이어선(Stayer's Line · 주로 폭 3분의1 지점 표시선) 안쪽에서 타세요.”

사부와 나란히 피스타를 돌았다. 경사 때문에 몸이 기울어지는 느낌이 낯설었다. 주행이 끝났는데 뭔가 미진했다. ‘금단의 선’ 너머에서 달려보고 싶었다. 인터뷰했던 그 선수가 말한 ‘차원이 다른 무언가’가 거기에 있을 것 같았다. 휴식시간에 사부에게 간청했다. “내가 언제 또 오겠어요.”

난감해진 사부가 체험을 총괄하는 김 회장을 쳐다봤다. 김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가 혼잣말을 뱉으며 자전거에 올랐다. “도전정신이 강한 건지, 무모한 건지.”


●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감 뚫고 전진

“코너를 통과할 땐 최소 30km 이상 스피드를 내야 합니다. 높이와 경사 때문에 속도가 없으면 미끄러져 낙차를 할 수 있어요. 핸들을 제대로 못 꺾으면 펜스에 부딪칠 수도 있고.”

벨로드롬 트랙의 폭은 9.8m다. 타원형 코너의 최고 경사도는 35도. 주로의 맨 위로 달린다면, 코너를 지날 때 자전거가 약 3m 높이에 떠있게 된다. 그 높이에서 자전거에서 떨어진다면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사부의 목소리가 날카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 바퀴 워밍업 주행 후 스테이어선을 넘었다. 단체추발 등 일부종목에서 내·외곽 주로를 구분해 충돌을 막기 위해 그어진 선으로, 경륜에선 특별한 이유 없이 넘게 되면 제재를 받는다고 했다. 두 바퀴, 세 바퀴, 바퀴 수를 늘리며 주행 고도를 높였다. 경사가 가팔라지는 코너 진입로, 회전을 위해 핸들을 꺾자 몸이 훅 기운다. 삼킬 듯 달려오는 벽. 머리카락이 쭈뼛, 등이 서늘해졌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며 다리 힘이 풀렸고, 차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떨어졌다. “밟아요!” 옆에서 따라오던 사부가 기자의 등을 힘껏 밀어준다. 하얗던 머릿속에 ‘깜빡!’ 불이 켜지며 미친 듯 페달을 밟았다. 픽시가 하늘을 나는 듯 코너를 통과한다. 온 몸이 쾌감으로 전율했다. 돌면 돌수록 괴물 같던 공포와 친근해졌고, 벨로드롬을 놀이기구처럼 즐기게 됐다.


● 펑크가 가르쳐준 교훈

“좀만 젊었다면, 경륜선수 해도 되겠네요.”

일정이 끝나자 사부가 제자의 기를 살려줬다. 사자와의 사투에서 승리한 콜로세움의 검투사처럼 들떠있던 기자, 사부의 립 서비스에 한껏 고무됐다. 예정에 없던 피스타 한바퀴(333.3m) 주파기록을 재달라고 요청했다. 29초2. 스톱워치에 자존심이 붕괴되는 숫자가 찍혔다. 경륜선수 평균기록 18∼19초에 10초나 뒤졌다. 선수들은 주행테스트에서 22초를 넘기면 출전자격이 박탈된다.

즉시 재도전 선언. 기록을 단축하려 사부에게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부탁했다. 사제출마(師第出馬), 사부의 리드로 속도를 높여 코너에 도달했다. 이젠 직선주로로 내리꽂을 차례. 스퍼트 직전, 자전거에서 ‘피지직’ 불길한 소리가 났다. “멈춰!” 사부의 다급한 외침. 참관하던 김 회장이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뭔가 사달이 났구나.’ 배운 대로 페달을 뒤로 돌려 급감속, 경사로를 내려가는데 바퀴가 죽죽 미끌린다. 김 회장이 완력으로 기자의 픽시를 세웠다. 그제야 내려앉은 바퀴가 눈에 들어왔다. 펑크였다.

과욕이 화를 부를 뻔 했다. 고속주행 중 펑크는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선수들도 멘붕에 빠진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은 덜 위험한 뒷바퀴였다는 점. 실내훈련 중 펑크는 3년 만에 본다는 사부는 “오늘 정말 많은 걸 체험하네요”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지나친 두려움도 지나친 욕심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 벨로드롬 체험이었다. 균형을 잡아야 달릴 수 있는 자전거처럼, 인생에서도 치우침 없이 중용의 미덕을 지키며 살라는 교훈이 바퀴자국처럼 가슴에 새겨졌다.

광명|김재학 기자 ajapt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ajap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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