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피플] 롯데 최준석 “주저앉지 않고 기회 기다렸다”

입력 2014-07-08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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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최준석이 6월 팀 대반격의 선봉장에 섰다. 시즌 초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선발라인업에도 밀렸지만, 5월부터 맹타를 휘두르며 프리에이전트(FA) 몸값을 증명하고 있다. 스포츠동아DB

■ 롯데 최준석

포수로 프로데뷔후 어깨 부상으로 ‘위기’
“타격으로 승부 보자” 결심에 주전 ‘도약’
두산 트레이드, FA로 롯데복귀 등 ‘굴곡’
부진 딛고 6월 폭풍타 오뚜기처럼 ‘부활’

롯데 최준석(31)은 3월 한화와 개막 2연전을 9타수 1안타(타율 0.167)로 시작했다. 4월 타율은 0.190이었다. 루이스 히메네스, 박종윤에 밀려 선발 라인업에서 빠지기 일쑤였다. 대타로 불규칙하게 나오다보니 더욱 안 풀렸다. 2013년 11월 롯데와 4년 총액 35억원에 달하는 프리에이전트(FA) 대형계약을 했기에 팬들의 눈총은 더 따가웠다.

반전 기미는 5월(타율 0.324)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롯데 6월 대반격의 선봉은 최준석이었다. 타율 0.368에 8홈런 19타점을 몰아치며 지난해 포스트시즌 두산전에서 보여줬던 가공할 파괴력을 되찾았다. 14홈런은 히메네스와 팀 내 공동 1위이고, 타점은 3위(43점)까지 올라왔다. 롯데가 최준석을 데려온 필연성을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4일 사직 SK전에 앞서 만난 최준석은 이제야 “힘들었다”는 고백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 시련은 나의 힘

5월까지 최준석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돈값 못한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꾸준히 타석에 서다보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은 굳건했다”고 고백했다. 최준석의 야구인생은 언제나 악조건을 딛고 일어서는 궤적을 그렸다.

최준석은 “포항에서 고교를 나와 거기가 고향인 줄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원래 대구 출신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재혼을 하자 졸지에 소년가장이 됐고, 나와 하나뿐인 남동생은 갈 곳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지켜야할 남동생 생각에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포항에 계신 할머니 집으로 동생을 보냈고, 최준석은 야구부에 들어갔다. 숙소생활을 해야 밥이라도 안 굶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최준석은 2005년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긴다. 어린시절의 아픔을 감싸준 거의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어두운 길로 빠졌을 것”이라고 떠올린다.

당장 살아남으려면, 또 인생을 바꾸려면 야구를 잘해야 했다. 원래 포지션은 포수였다. 어깨만큼은 정말 강했다. 삼성 김건한(개명 전 김희걸), 롯데 박종윤이 당시 멤버였다. 포수로서 최준석은 롯데의 2001년 신인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첫 3년 동안 1군 출장은 딱 2경기였고, 1안타를 쳤던 것이 전부였다. 무릎 통증까지 겹쳤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반전은 2004년 양상문 감독(현 LG 감독)이 부임하며 이뤄졌다. 최준석은 10경기에 나가 4안타를 쳤는데 이 중 2안타가 홈런이었다. 이어 2005년 시즌을 앞둔 캠프에서 최준석이 어깨 부상을 당해 더 이상 포수를 할 수 없게 되자 지명타자로 전환시켰다. 그 반사이익을 얻어 당시 고졸 2년차 선수였던 강민호가 일약 주전포수가 될 수 있었다.

최준석은 “포수를 못하게 됐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타격으로 승부를 보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고 회상했다. 그해 100경기에 나가 8홈런 42타점을 올려 양 감독의 믿음에 보답했다. 그러나 2006년 강병철 감독이 부임했고 용병타자로 펠릭스 호세를 데려오자 최준석의 자리는 사라졌다. 두산으로의 트레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 가장 듣고 싶은 말, “팀 플레이어”

롯데를 떠나며 한때 재활동기였고, 한집에서 살기도 했던 절친 이대호(소프트뱅크)와도 헤어졌다. 그러나 두산이라는 생소한 환경에서 최준석은 또 살아남았다. 생존 이상의 임팩트를 두산에서의 8년간 보여줬다. “두산에서도 힘든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벤치로 밀려났던 2012∼2013시즌이 가장 힘들었다. 그러나 그때 불평하고, 주저앉지 않고 기회를 기다렸기에 좋은 조건으로 롯데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믿는다. 4년 총액 35억원에 친정 롯데로의 금의환향, 숱한 시련에 굴하지 않았던 최준석 야구인생의 결실이기도 했다.

최준석은 “많은 경기에 나가고 싶다”고 야구인생의 ‘소박한’ 목표를 말했다. 팀 승리에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다. 그 중 으뜸은 홈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에게 영광을 바치는” 홈런 세리머니를 많이 보여줄수록 롯데 팬들도 웃을 것이다.

포철공고 동기동창인 박종윤을 향한 고마움도 빠뜨리지 않았다. “낯선 포지션인 좌익수 수비를 기꺼이 맡아줬기에 히메네스(1루)와 내(지명타자)가 나란히 경기에 나갈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최준석은 2010년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은 현재의 시련을 극복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고난을 이겨낸 사람은 쉽사리 꺾이지 않는다. 굴곡이야 있겠지만 최준석의 미래도 그럴 것 같다.

사직|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matsri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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