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야구여행] 박정진 인생극장 ‘대나무 마디처럼…’

입력 2015-05-15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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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는 마디가 있어 높이 자란다. 인생에서도 시련은 성장을 위한 발판. 한화 박정진은 6년 전 방출 위기를 야구인생의 마디로 삼아 성장한 뒤 불혹의 나이에도 불펜의 핵으로 맹활약하고 있다. 스포츠동아DB

■ 한화 정리대상에서 ‘황혼의 승부사’ 되기까지

“그땐, 1년이 아니라 단 한 번만이라도
아프지 않고 던져보는 게 소원이었다”

6년 전 고질적 어깨 부상…결국 ‘가망 없음’ 판정
한대화 감독 방출 철회 요청으로 가까스로 기회
“그때부터 이상하게도 어깨가 아프지 않더라고요”

대나무 마디처럼…시련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 친구는 빼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써보겠습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시죠.”

2009년 가을, 한화 사령탑으로 부임한 한대화 감독은 김정무 운영팀장을 찾았다. 구단이 건네준 정리대상자 명단을 살펴본 뒤 방출 철회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새 감독의 부탁이니 구단으로서도 거절할 수 없는 노릇. 방출 직전의 그는 그렇게 살아났다. 지금 ‘불꽃투혼의 심장’, ‘한화 돌풍의 주역’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박정진(39) 얘기다.

“1998년 동국대 감독을 맡았을 때, 연세대 4학년 박정진을 봤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당시 구위와 활약상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냥 방출시키기 아까웠다. 게다가 당시 한화엔 왼손타자도 없었지만 왼손투수도 없었다. 한상훈, 고동진마저 군대 가고 없었고, 마일영이 히어로즈에서 오기로 돼 있다는 얘기는 있었는데 아직 트레이드가 되기 전이었고…. 좌완 박정진을 어떻게든 살려서 원포인트 릴리프라도 쓰고 싶었다.” 현재 KBO 경기운영위원을 맡고 있는 한대화 전 한화 감독은 6년 전을 그렇게 회상했다.

박정진은 세광고 시절이던 1994년 경북고 이승엽, 경남상고(현 부경고) 김건덕 등과 함께 캐나다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였고, 한화와 연세대의 스카우트 전쟁에 휘말렸던 유망주였다. 연세대를 택한 뒤 국가대표 좌완 에이스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어깨가 자주 말썽을 부렸다.

1999년 한화 입단 후에도 반짝 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어깨를 비롯해 발목, 허리 등 부상을 달고 살았다. 2005년과 2006년 2년간 공익근무를 한 뒤 복귀했지만 공을 던지는 날보다 재활하는 날이 더 많았다. 2009년까지 3년간 1군에서 던진 경기수는 고작 22경기(10.2이닝). 구단은 결국 ‘가망 없음’ 판정을 내리고 정리대상자로 분류했다. 그 무렵 박정진도 알음알음 돌아가는 분위기를 눈치 챘다. 아픈 어깨가 원망스러웠다.

“이대로 방출되면 억울하다고 생각했지만 저도 더 이상 가망 없다는 걸 알았죠. 군복무 후 구단이 3년을 기다려줬는데…. 오히려 기다려준 구단이 고마울 따름이었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순간, ‘희망의 동아줄’이 내려왔다. 일본 미야자키 교육리그 명단에 포함됐다는 통보였다. 당시 그의 나이 만 33세. 스무 살을 갓 넘은 어린 선수들이 초대되는 교육리그에 최고령 선수로 참가했다.

“그땐 1년이 아니라 단 한 번만이라도 아프지 않고 공을 던져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유니폼을 벗어도 한이 없겠다고 생각했죠. 이상하게 그때부터 어깨가 아프지 않더라고요. 6년 전 그때 ‘한 번만’ 했던 게 이렇게 됐네요. 제가 마흔 살까지 던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힘들거나 제 자신이 나태해질 때 항상 그때를 생각해요. 방출 명단까지 올랐던 그 때를. 그 아픔이 저를 이렇게 성장시켰으니까요.”

박정진은 빙긋 웃었다. 세월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지만, 아직 ‘절대 동안’인 그의 얼굴만 보고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그 미소를 보니, 선수를 함부로 버려서도, 버림받았다고 함부로 포기해서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대나무가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은 사이사이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거친 비바람에 견딜 수 있는 것도 중간 중간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마디가 없다면 미끈하게 보기는 좋을지 몰라도, 마디가 있기에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마디 없는 인생이 있을까. 박정진은 부상의 질곡, 방출 위기의 시련을 성장판의 마디로 삼았다. 불혹의 마당쇠, 황혼의 역투. 올 시즌 시도 때도 없이 마운드에 올라 불꽃투혼을 던지고 있는 박정진이 저녁노을보다 더 아름다운 이유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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