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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드나들던 성수동은 늘 겨울이었다. 심지어 한 여름에도 성수동 골목에 들어서면 알 수 없는 냉기가 느껴져 살며시 몸을 떨기도 했다. 기름때로 얼룩진 낡은 건물과 기계가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굉음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없는 거친 담벼락이었다. 때문에 오로지 앞만 볼 수 있도록 눈가를 가려놓은 마차의 말처럼 그저 가야하는 길만 걸었다. 지금껏 기억으로 남아있는 길은 하나, 성수역에서 거래처를 오가던 그 길 뿐. 내 안에 잠들어있던 ‘성수동 본능’이 오늘도 나를 그 길로 이끌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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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역을 빠져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춰 섰다. ‘슈스팟 성수’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는 역사 안. 대한민국 수제화 산업의 중심지, 라는 미처 알지 못했던 과거의 수식어는 새로운 성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성수역 1층에서 마주친 빨강 하이힐을 신은 고양이. ‘고양이의 빨간 꿈’이라 이름 붙여진 조형물이 지키고 있는 수제화 공동매장에서 이곳 장인들의 바람을 보았다. 사라져버린 과거가 아닌 오늘도 진행 중인 그들의 땀이 묻어 있기에 나에게 비춰진 미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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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역을 지탱하는 교각 아래에 길을 건너기 위해 섰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교각의 건조함이 괜한 긴장감을 불러온다. 길을 건너 들어선 골목의 한 건물 외벽에 붙은 벽시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려있는 그 노글노글한 모습에 긴장감은 사르르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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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이 여기저기 까지고 패어진 창고가 나타났다. 누더기가 다 되어버린 건물 2층 창 안에 걸린 조명과 흰 천은 요즘 이 창고의 진면모를 살며시 드러낸다. 패셔니스타들의 아지트, 대한민국 패션계의 새로운 핫플레이스 그리고 성수동을 뜨겁게 달구는 힘, 대림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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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숲을 향해 골목을 누빈다. 골목은 저마다 자기만의 세월을 품고 있다. 내가 서울에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이 나뉘어져 이 골목 저 골목에 흩뿌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시간에 대한 기억만으로는 부족했을까. 때때로 ‘여긴 어딜 닮았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풍경. 브루클린, 멜버른, 상하이 그리고 부산의 어느 뒷골목까지. 시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골목, 그것이 오늘 나의 카메라가 찾아낸 성수동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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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세상을 피해 고요한 골목에 숨어버리려 해도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하나가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라는 갤러리아포레. 강남도 아닌 성수동의 아파트가 왜 제일 비싼지 궁금했지만 서울숲 앞에서 ‘너 때문이었구나’라고 혼자 결론을 내린다. 서울숲이 이 아파트에 살고 싶은 결정적인 이유라면, 이 아파트는 성수동을 뜨겁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 사람들은 이쯤에서 살고 싶고 또 즐기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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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숲에서 뚝섬역으로 가는 길, 또 다시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바로 옆의 갤러리아포레가 뭔지도 모를 것 같은 갈비 골목에는 대낮부터 고기 굽는 연기가 피어난다. 그 골목에서 가지를 치듯 연결된 골목 안으로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지나가는 이들의 발길을 잡는다. 먹을거리와 꾸밀거리, 볼거리 들이 그럴싸한 이름을 달고 구미를 당기게 하는 모습. 얼마 전까지 평범한 가정집이었을 것 같은 곳들이 담을 허문, 내 집이 아닌 모두의 집이 되고픈 그들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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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한 골목을 지키는 대포집과 카페. 한집에는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옆집에는 불타는 청춘들이 함께 웃고 떠드는 동네. 하지만 어느 한 곳은 사라져가고 다른 한 곳은 점점 자리를 넓혀가는 안타까움이 점점 커져만 가는 듯한 현실. 오늘 성수동은 그렇게 보였다.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앞두고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7월의 문턱, 성수동은 지금 그 시간을 닮아있었다. 오늘 렌즈에 담긴 풍경을 넘기며 바래본다. 무더위 뒤에 찾아드는 가을의 낭만이 무사히 성수동의 골목골목에 움트기를, 내 맘 속에 일렁이기 시작한 성수동의 유희본능이 내일도 계속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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