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호 인터뷰①] ‘박교주’의 흥망성쇠 그리고 생과 사의 갈림길

입력 2015-11-19 16: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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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호, 사진|마이다스이엔티

제 아무리 기구하고 파란만장하다고 해도 이 사람만 할까 싶을 정도로 박명호의 삶은 심하게 굴곡져 있었다.

래퍼로서 흥망성쇠를 겪은 것은 물론이고, 한 인간으로서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적도 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발생한 공황장애는 그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대중 앞에 섰다. ‘할배와 삼촌’이라는 남자데일리 패션 블로그를 운영하며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있으며, 지난 10월 랩퍼로서도 13년만의 솔로곡 ‘엄마’를 발표해 ‘박교주’의 귀환을 알렸다.

1995년 혼성그룹 HONEY의 데뷔 이후 박명호의 파란만장했던 20년이라는 세월을 제대로 풀어내려면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수준이겠지만, 그래도 인터뷰동안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교주 박명호’와 ‘인간 박명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박명호는 현재 힙합씬에서 많이 희미해진 이름이다. 2012년까지 꾸준한 활동을 펼쳐온 박명호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2002년 발매된 솔로앨범 ‘사진’이나 90년대 하니패밀리의 리더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힙합씬 곳곳에는 여전히 박명호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일례로 랩퍼들이 흔히 쓰는 ‘두 손 머리위로’라는 구호도 박명호는 자신 있게 “내가 처음 했다”라고 말했다.

박명호는 “내가 원래 한국적인 마인드가 강했다. 1998년도에 다들 ‘Put Your Hands Up’이라고 할 때 난 ‘난 영어 싫고 한국어가 좋으니까 한국어로 할래. 모두 두 손 위로’라고 했었다”라고 자신이 원조임을 알렸다.

또 클럽 문나이트에서 최초로 한국어 랩을 한 장본인이며, 최초의 힙합 크루 허니패밀리를 통해 국내에 프리스타일 문화를 정착시킨 선구자이기도 하며, ‘사진’에서는 최초의 리얼리티 랩을 선보이기도 했다.

물론 정확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내용들은 아니기 때문에 ‘최초’라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박명호 특유의 가사와 랩스타일은 분명 리쌍과 버벌진트 등 현재 힙합씬을 주도하는 랩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실제 최근 리쌍은 자신들의 콘서트에 박명호를 초대해 무대 위에서 “우리 음악의 아버지다”라고 리스펙트를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 힙합 역사에 여러 족적을 남긴 박명호의 시작은 클럽에서였다. 박명호는 “난 18살 때부터 랩을 하고 춤을 췄다. 그때 증인도 있다. 그렇게 프리스타일을 하고 랩을 한다는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배틀도 하고 그랬다. 그때 영풍이와 디기리를 만났다”라고 회고했다.

그렇게 랩 잘하는 언더그라운드 랩퍼로 이름을 알리던 중 정식 데뷔를 한 건 1995년 혼성그룹 HONEY였다. 박명호는 “(이)하늘이 형이 날 캐스팅했고, 카페에서 제작자와 만나 그 앞에서 랩을 했다. 연습생 그런 거 없고, 바로 녹음하고 바로 첫 방을 했다”라고 입을 열었다.

데뷔까지는 순식간에 이뤄졌지만 이 앨범을 서포트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화려하다 못해 놀라울 지경이다. 박명호는 “HONEY의 프로듀서가 션과 페리다. 또 ‘X라는 아이’를 도와준 게 서태지였다. 연희동 자택에 가서 서태지에게 랩을 배우기도 하고 그랬다”라고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지원해줬음을 알렸다.

게다가 데뷔 당시 곡의 반응도 좋아 HONEY 행보는 탄탄대로일 것 같았다. 하지만 건강이 문제였다.

박명호는 “강직성 척추염이있다. 활동을 하는데, 흔한 병이 아니다 보니 당시 병원들이 생소해서 잘 몰랐다. 결국 하반신 마비가 왔고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애 누나가 팀을 떠나 해체를 하게 됐다”라고 아쉬웠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 이후 4년 동안 음악에만 몰두했다는 박명호는 많은 가사를 썼고, 이 때의 시간과 경험이 허니패밀리의 탄생 밑거름이 됐다. (여담으로 ‘랩교’ 역시 이시기에 쓴 가사로, 박명호는 ‘내가 이리 랩을 잘하니 신적인 존재다. 그래서 교주다. 하고 즉흥적으로 쓴 내용’이라고 밝혔다)

박명호는 “4년 동안 집에서 많이 도움을 받았고, 폐인처럼 살았다. 그때 최재유와 김반장과 함께 살았다”며 “내가 한국 프라이드가 강해서 흑인음악 동호회에 한국어로 랩을 하라며 배틀을 건 적이 있다. 그때 무대에서 배틀을 한 상대가 MC메타였다”라고 가리온과의 첫 인연을 떠올렸다.

이어 “그런데 그다음에 재유와 음악적 견해 차이로 트러블이 있었고, 재유가 가리온으로 가더라. 그래서 난 주라에게 갔다. 주라가 프로듀서로는 정말 갑이다. 주라만큼 비트를 찍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 이후는 알다시피 최재유는 DJ J-U라는 이름으로 가리온의 1집 프로듀서 겸 DJ로 데뷔했고, 박명호는 허니패밀리의 리더로서 이름을 알렸다.

박명호, 사진|마이다스이엔티


박명호는 “그때부터 한국어로 랩을 많이 했다. 99년에 ‘우리 같이 해요’라는 곡이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됐는데 그 곡이 대박이 났다”라며 “그때 ‘남자이야기’도 만들었는데, 그때는 자기 동네 이야기하고 그런 가사가 없었다. 그런데 우린 그때부터 그렇게 현실적으로 했다. 그런데 너무 앞섰다. 허니패밀리의 전성기는 1집 때까지였다”라고 짧았던 전성기를 털어놓았다.

이어 박명호는 “우리가 프라이드 강하다보니 새로운 음악을 찾았다. 그게 (허니패밀리 2집) ‘워워’다. 그 훅 대박인데, 너무 앞섰다. 허니패밀리면 ‘남자 이야기’같은 걸 기대했나보다”라고 아쉬워했다.

여담으로 허니패밀리는 유난히 방송 활동도 많지 않은 그룹이었는데, 박명호에 따르면 그 이유는 길 때문이었다.

박명호는 “그때 당시 길이 ‘아 우리는 카리스마가 있어야하니 그런 거 하면 안된다’라고 예능 출연 같은 걸 극구 반대했었다”라며 “그랬던 길이 나중에 달마 복장하고 TV 나온걸 보니 기가 차더라”라고 털어놔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다 개리와 길이 허니패밀리를 나와 리쌍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허니패밀리의 영향력은 더 줄어들게 됐다. 그렇지만 박명호는 리쌍의 독립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고 밝혔다.

박명호는 “사실 리쌍이라는 이름도 내가 지어준거다. 2002 대한민국에 디기리까지 리쌈 트리오 만들어줬고, 디기리가 솔로하고 싶다고 해서 개리와 길이 리쌍이 됐다”라며 “리쌍이 데뷔하고 잘돼서 진심으로 축하하고 박수를 쳐줬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이가 나에게 노래 자랑을 하더라. 그래서 좀 화가 나 그 후렴구와 훅이 허니패밀리 2집에 다 있던 거라고 말하니 아무 말도 못하더라. 그러더니 이번에 리쌍 극장에서 그렇게 말하더라”라고 지금까지 이어온 리쌍과의 인연을 밝혔다.

이어 박명호는 “사실 허니패밀리 3집때 같이 하려고도 했는데 일이 잘 안됐다. 지금은 내가 같이 하자고 하는 게 오히려 민폐다”라고 리쌍의 인기를 이용할 생각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

2집 이후 어수선했던 허니패밀리를 잠시 멈춰두고 박명호 역시 2002년 솔로앨범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타이틀곡 ‘사진’은 아직까지도 그의 대표곡이 될 정도로 대박이 났다. 하지만 그 인기나 명성에 비해 방송활동은 그리 많지 않았고, 이번에도 건강이 문제였다.

박명호는 “맹장이 터져서 스케줄을 다 취소하고 나니 타이밍상 ‘사진’ 활동을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야호’로 오버랩했다가 좀 또 괜찮았는데 방송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라고 털어놓았다.

재미있는 점은 박명호의 다음 선택은 솔로 2집이 아니라 허니패밀리의 3집었다는 것으로, 박명호는 “외로워서 그랬다”라고 머쓱하게 웃었다.

박명호는 “솔로 1집 내기 전에 김창환 프로듀서하고 계약을 했는데, 그때 내 계약금이 1억 원이었다. 장당 3억에 계약하자는 데도 있었다. 그런데 김창환 프로듀서가 ‘난 너와 비즈니스를 하자는 게 아니다. 음악을 하자는 거다’라고 하길래 다음날 1천만 원에 계약을 했다. 난 돈 같은 거 신경 안 쓴다. 1집을 하고 나간 건 앨범을 안내주고 자꾸 프로듀서를 하라고 해서 나간 거다”라고 당시 소속사를 나간 이유를 밝혔다.

이어 “그런데 나오고 나니 사람들을 많이 못 믿겠더라. 그래서 (이)준호 형을 찾아갔고, 작업실에 가니 그 밑에 주라가 살고 있더라. 그렇게 같이 쿵짝 쿵짝 하다 보니 ‘그냥 3집 할까’해서 그렇게 했다. 또 주라가 정말 잘한다”라고 박명호 2집이 아니라 허니패밀리 3집을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3집 활동이 끝나고서는 기흉 때문에 또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됐다는 박명호는 사람들에게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박명호는 “컬투 들어가서 4집 만들고 ‘오늘밤 일’을 발표했는데, 이건 어른들 보라고 만든 거다. 그리고 5집때 DH엔터테인먼트를 만들었는데 어떤 매니저가 자기가 데려온 멤버를 허니패밀리에 넣어서 같이 하자고 하더라. 그럼 자기가 방송스케줄 모두 정리해준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방송 딱 한번 나가고 활동을 접었다. 사람이 약속을 못 지킬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럼 사과를 하는 게 기본인데 그렇지가 않다”라고 씁쓸함을 드러냈다.

이어 “그 다음부터 OST나 프로듀싱을 하긴 했는데, 그냥 사람들이 싫었다. 처음에 봤을 때 사탕발림을 하다가 따먹히고 차인 느낌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다. 친절하게 배려를 하면 또 덤비고 이용하고 그런다. 사람에게 치인 거다”라고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음을 털어놓았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수준의 패닉에 빠진 건 아니었다. 인생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2012년에 발생했고 이는 그의 인생을 다시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허니패밀리, 사진|마이다스이엔티


②에서 계속

동아닷컴 최현정 기자 gagnrad@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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