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6년 1월 21일
1990년대를 대중음악이 꽃을 피운 시대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발라드와 댄스음악이 공존했고, 또 서태지와아이들 같은 걸출한 스타도 제법 등장한 덕분일까. 하지만 실제로 대중음악의 다양성이 얼마나 실현됐는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건강한 문화적 토대를 일궜는지는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현재 대중음악 시장을 장악한 아이돌 문화가 이미 이때부터 댄스음악을 기반으로 그 영역을 넓혀놓은, 획일적 시장구조를 형성하게 한 시대는 아니었을까. 그런 상황 속에서 트로트는 이른바 ‘성인가요’로 불리며 오로지 기성세대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다. 대중음악의 유력한 유통 경로인 방송에서도 전문 트로트 프로그램은 KBS 1TV ‘가요무대’를 빼고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1996년 오늘 MBC가 ‘트로트 청백전’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이 같은 흐름의 변화를 꾀했다. 매주 일요일 밤 11시35분이라는 방송 시간대의 한계 속에서 이 프로그램은 대표적인 트로트 스타들을 무대 위로 불러냈다.
‘트로트 청백전’은 트로트 가수들이 청백팀으로 나뉘어 성(性) 대결을 펼치는 무대. 그해 초 신년특집으로 방송한 ‘트로트 대항전’이 좋은 반응을 얻은 뒤 고정 프로그램으로 편성됐다. 이날 첫 방송은, 이제는 고인이 된, 가수 겸 방송인 박상규와 하지은 아나운서가 진행했다. 태진아, 설운도, 송대관, 윤수일이 심수봉, 최진희, 현숙, 문희옥 등 여가수들과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순위 코너도 마련돼서 당시 ‘찬찬찬’으로 인기를 모은 편승엽이 무대에 올랐다. 신인을 소개하는 순서도 열렸다.
이에 앞서서는 SBS가 1995년 말 ‘캠퍼스 트로트 가요제’를 열었다. 이를 이듬해 신년특집으로 방송했다. 그리고 그해 9월 말 그 무대를 넓혀 실제 대규모 경연을 펼쳤다. 여름부터 열린 예심에만 무려 850명의 대학생들이 지원을 할 정도로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본선에는 16개팀이 출전해 기량을 뽐냈고, 대상은 단국대생 서은선씨가 차지했다.
하지만 이 무대는 창작이 아니라 기성의 노래를 부르는 형식이었다. 서은선씨 역시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을 불렀다. 또 신년 혹은 추석 특집으로 마련된 프로그램 성격이 강했던 탓이었을까.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현재에도 많은 트로트 가수들이 비좁은 방송 무대에 서기 위해 노력을 펼치고 있다. 아이돌이 장악한 대중음악 시장의 방송 환경과 구조 안에서 한정적인 팬층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젊은 피들의 활약도 눈길을 모은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