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발리볼] 감독의 사인보다 강력한 ‘몸의 기억’

입력 2016-02-25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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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 신영철 감독(가운데)은 현역시절 명 세터였다. 그러나 7일 현대캐피탈전에서 패하면서 봄배구 탈락의 위기를 맞이했다. 세터 강민웅은 팀의 시즌 운명을 가른 그날 경기에서 생각 이전에 몸에 밴 습관 때문에 감독의 작전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스포츠동아DB

한국전력, 7일 현대캐피탈전 역전패
강민웅, 작전과 달리 속공 구사 ‘패인’
“사인 봤는데…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7일에 벌어졌던 ‘NH농협 2015∼2016 V리그’ 남자부 5라운드 한국전력-현대캐피탈전은 많은 후일담을 만들었다. SBS스포츠가 중계했던 이 경기는 1.727%의 높은 시청률을 마크할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5세트 11-14에서 현대캐피탈의 대역전승 장면은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했다. 연속 실점이 나올 때마다 보여준 한국전력 신영철 감독의 애타는 표정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했다. 벤치의 작전지시를 세터가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대표적 사례다.

결국 한국전력은 그 패배가 시즌의 운명을 갈랐다. 23일 수원에서 삼성화재에 1-3으로 패하면서 봄배구 탈락이 확정됐지만 시즌의 분수령은 그때였다. 그래서 감독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세터와 신뢰감을 쌓는 것이다.


선수는 긴장하면 본능대로, 근육의 기억대로 움직인다.

이날 신 감독은 12-14에서 타임아웃을 부른 뒤 구체적인 작전지시를 했다. 최민호의 목적타 서브와 현대캐피탈의 높은 블로킹을 감안해 사이드를 이용한 공격을 지시했다. “폭을 이용하라”고 했다. 하지만 강민웅은 2번 연속 전진용을 이용한 중앙속공을 시도하다 블로킹에 걸렸다. 신 감독은 스페셜비디오판독으로 경기의 흐름을 끊으면서 또 한 번 폭을 강조했지만 강민웅의 다음 공은 전광인을 이용한 중앙파이프 공격이었다. 또 블로킹에 걸렸다.

3연속 블로킹으로 경기의 흐름은 넘어갔다. 다급해진 강민웅이 마침내 얀 스토크를 이용해 사이드에서의 백어택 공격을 시도했지만 아웃되면서 경기가 끝났다. “우리 입에 넣어준 밥을 뱉어버렸다”고 했던 그 경기 다음날 신 감독은 강민웅에게 “어제 왜 그랬냐”고 물었다. 강민웅은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고 대답했다. 감독의 지시는 들었지만 긴장한 나머지 생각은 하면서도 몸은 습관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강민웅은 평소 중요한 순간 중앙에서 속공을 자주 구사했다. 삼성화재 시절부터 호흡을 맞춰온 전진용을 많이 이용했다. 선수는 긴장하거나 힘든 상황이 오면 생각보다는 몸이 기억한 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모든 팀들이 시즌 내내 같은 내용의 훈련을 반복한다. 생각 이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고 움직이도록 하는 피나는 노력은 팀 훈련의 기본이다.


● 상대의 동작을 연구하고 예측하면 이기는 길이 보인다.

여자배구 베테랑 유화석 전 흥국생명 감독은 실업배구 시절 호남정유의 연승기록을 깬 비책을 들려준 적이 있다. 당시 실업배구 최강팀 호남정유를 꺾을 비책을 찾던 유 감독은 소속팀 선경 선수들에게 “자기 포지션의 호남정유 선수들이 어떻게 하는지 계속 보고 따라하라”고 했다. 오래 ‘보고 따라하기’를 반복하면서 선경 선수들의 머리 속에서는 상대 선수의 생각과 행동패턴이 자연스럽게 예측됐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것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호남정유의 조직력도 무섭지 않았다. 결국 1995년 1월 3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벌어진 95한국배구슈퍼리그 1차대회 여자리그에서 선경은 호남정유를 3-1로 격파하고 연승을 92에서 멈추게 했다. 장윤희 이도희의 호남정유는 1991년 3월 대통령배 3차 대회 흥국생명전 이후 이어온 연승행진을 3년10개월 만에 마감했다.

당시 선경의 주전 멤버가 장소연 강혜미였지만 류화석 감독은 이날 경남여고 졸업반 노영실을 센터에, 보조세터 김현정을 주전세터로 기용해 우리의 습관은 버리고 상대의 습관은 예측하며 대어를 낚았다. 류 감독은 위기 때 선수들의 행동패턴을 짐승의 행동과 비유해 설명했다. “다급해지면 짐승들은 합리적 판단을 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평소 가던 길을 간다”고 했다. 그래서 사냥꾼들은 그 길에 덫을 친다고 했다. 각 팀의 경기분석관들이 코트 뒤에서 매의 눈으로 상대팀과 우리 팀을 바라보는 이유다.

전반기 무서운 기세로 내달리던 현대건설은 후반기 눈에 띄게 주춤했다. 벌어놓은 승수가 많아 포스트시즌 진출은 문제가 없었지만 봄배구의 희망을 찾기 어려웠다. 사람들마다 지적하는 원인은 달랐다. 흐트러진 리시브 라인과 약해진 서브, 양효진의 부상 등이 언급됐다. 오른쪽 날개 황연주가 득점력이 떨어져 토털배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도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황연주는 전반기 연타에 눈을 떠 다양한 공격으로 점수를 뽑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예전의 황연주로 돌아갔다. 크로스 강타 공격이 많아졌다. 상대 팀에서 블로킹 벽과 수비진형을 짜기가 쉬웠다. 어디에 공이 올 줄 알고 준비하면서 공격성공률이 떨어졌다. 뚫리지 않는 곳으로 공을 계속 주는 세터는 없다. 황연주의 공격비중이 줄었고 성공률은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후반기 현대건설이 예전처럼 정상으로 돌아온 경기는 13일 도로공사전과 23일 인삼공사 경기였다. 모두 황연주의 공격가담이 20% 이상, 성공률도 40% 언저리에 있을 때였다. 수치보다 중요한 것은 황연주의 공격스타일과 공을 떨어뜨리는 장소였다. 상대가 예측하기 어렵게 깎고 밀고 달래서 때렸다. 코스도 크로스와 직선을 모두 노렸다. 강타와 연타도 섞었다. 배구는 상대와 ‘가위바위보’ 싸움이다. 황연주는 그것을 알았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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