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경마의날 맞아 열린 ‘말 위령제’
생(生)이 있으면 몰(歿)은 피해갈 수 없다. 경주마 또한 마찬가지다. 한해 평균 1000마리가 넘는 경주마가 데뷔한다. 반면 데뷔하는 숫자만큼은 경주로를 떠나야 한다. 떠나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경주마로 태어난 말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경주로였을지언정 질주본능을 그대로 분출해 냈으니 행복한 삶이었으리라. 하지만 경주마들 중 그 본능을 분출하는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경주마로 가장 행복한 삶은 현역 시절 화려한 성적으로 많은 경마팬들의 사랑을 받고 은퇴 후에는 씨수말로 활동하는 것이다. 혈통의 스포츠(Blood Sports)라 불리는 경마에서 배출해낸 자마들이 활약할수록 부마의 가치가 올라가 은퇴 후에도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또 자마들의 활약에 따라 경주마시절보다 더욱 많은 부를 창출해 낼 수 있다. 하지만 현역 경주마 중 1%도 되기 힘든 게 바로 씨수말이다.
씨수말이 어렵다면 승용마로 용도가 전환되어 승마장 등에서 여생을 보낼 수도 있다. 보통 경주마로 활약했던 이력 때문에 전환되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씨수말이나 씨암말보다야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다. 하지만 모든 경주마들이 이렇게 평화로운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주마들 중에는 배앓이나 골절, 폐출혈 등 다양한 원인으로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 워낙 격한 운동을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부상이 뒤따르고 부상의 정도에 따라 생을 달리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주마로 살아오는 동안 경주성적도, 생김새도 마명도 서로 달랐지만 경마공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경주마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경주마의 마지막 쉼터인 말 소각장으로 향한다는 것. 말 소각장은 말 그대로 경주마를 화장하는 장소로, 렛츠런파크 별로 하나씩 있다.
이 소각장에는 평소에는 철문이 굳게 닫혀 있지만 죽음을 맞이한 경주마가 찾아오면 엄숙하게 그 시신을 받아들여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약 99m²(30평) 남짓한 콘크리트 건물 중앙에는 커다란 소각로가 있다. 소각로 내부는 섭씨 천도가 넘는 열기를 견디는 내화벽돌로 만들어져 있고 외벽에는 무시무시한 불꽃을 내뿜는 가스보일러가 박혀 있어 소각로 안으로 들어온 경주마를 화장한다. 소각처리를 이처럼 고온으로 하는 이유는 소각할 때 배출되는 다이옥신 등 유해물질의 배출을 막기 위해서다.
한국경마 불세출의 명마 ‘미스터파크’도 안락사 된 후 이곳 소각장으로 옮겨온 뒤 ‘위대한 기록’과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한줌 재로 변했다. 보통 경주마가 경마공원 안에서 죽게 되면 그 시신을 말 소각장 안으로 옮겨 그 자리에서 부검을 실시한다. 부검은 폐사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 수의사가 실시하는데, 경우에 따라 마주 등 마필관계자가 입회하기도 한다.
수의사의 부검이 끝나면 본격적인 화장작업이 시작된다. 호이스트(hoist)라는 소형 기중기로 말 시신을 들어 올려 소각로로 옮긴다. 소각로는 한 번에 한 마리밖에 처리할 수 없고 말 한 마리를 태우는데 4시간 정도가 걸린다. 한 번 태우고 난 소각로는 그 열기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기 때문에 바로 작업을 할 수 없다. 그래서 한꺼번에 2마리 이상의 말이 죽게 되면 나머지 말은 소각장 바닥에서 소각로가 식을 때까지 대기한다.
렛츠런파크 서울과 부산경남에는 마혼비(馬魂碑)라는 커다란 비석이 있는데, 경주마로 살아가다가 생을 마감한 말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한국마사회에서 세운 것이다. 매년 ‘경마의 날(5월20일)’에 말 위령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경주로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경주마들의 혼령을 달래어 경마가 무사히 치러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날은 마혼비 앞에 마사회와 경마 유관단체 관계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말이 제사상을 차려놓고 제문까지 읽는다.
경마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