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CD에 모든 상품의 약관 수록
가입상품 찾기 힘들고 식별기능 없어
금융감독원 한 차례도 점검없이 방관
보험사들이 가입자에게 주는 CD약관에 대해 금융소비자원(대표 조남희)이 개선을 요구했다. 보험사들이 자신들의 편의만 위해 가입자에게 많은 불편을 주고 있다는 주장이다. 보험사는 경비절감을 위해 문서약관 대신 CD약관, 최근에는 USB약관을 주지만 이 속에는 보험사의 의도가 숨어 있다.
● 사라진 문서형 보험약관
보험약관은 보험계약의 내용을 규정한 것이다. 보험금을 받기 위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중요한 계약서류다. 보험사들은 인쇄된 약관 또는 CD로 제작된 약관을 주고 있다. 최근에는 인쇄약관을 찾아보기 어렵다.
CD약관은 2002년 11월 금융감독원이 효력을 인정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금융감독원은 “보험계약자가 가입한 보험약관에 해당코드를 부여해 계약자가 CD약관을 통해 가입한 보험계약 내용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고 가입하지 않은 다른 보험약관과는 명확하게 구별되는 조건”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USB약관도 사용된다. 컴퓨터에 CD드라이브가 없어지고 USB포트만 설치되는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 보험사들이 금융감독원이 요구한 조건을 이행하지 않은 채 CD약관을 줘서 가입자들을 혼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보험사들은 한 장의 CD약관에 판매중인 모든 보험상품을 집어넣어서 준다. 가입자보고 알아서 찾아보라는 식이다. 가능하면 보지 말라는 의도다. 그동안 금융감독원이 보험사들이 CD약관을 제대로 만들고 있는지 한 차례도 점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 이 틈을 타서 보험사들이 입맛대로 행동했다.
● CD약관의 숨겨진 문제점은
소비자들은 보험가입 현장에서 약관내용을 검색하지 못한 채 청약서의 ‘보험약관 수령란’에 서명해야 한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CD약관을 열어보면 더 황당하다. 모든 상품약관이 나열되어 있고 가입자가 가입한 약관은 어느 것이란 표시는 없다. 가입자는 본인이 가입한 보험약관(주계약 및 특약)이 필요한데, 한 눈에 찾기가 어렵다. 보험증권을 꺼내 주계약과 특약 명칭을 일일이 확인한 뒤 CD약관에서 검색해야만 한다. 불편하고 성가신 일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보험사들이 식별기능을 부가하지 않아서다. 게다가 약관 자체도 전문용어와 수많은 단서조항을 달아 이해하기 어렵게 했다.
보험사들이 CD약관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약관 제작경비 절감과 관리의 편의 때문이다. 상품종류별 인쇄약관을 각각 제작하는 것보다 CD 한 장에 모든 상품의 약관을 넣으면 제작경비를 크게 줄이고 상품별 약관 수급관리에 따른 인력을 줄일 수 있다.
일부 보험사들은 “인쇄약관이 필요하면 CD약관으로 알아서 인쇄하거나 보험사 홈페이지의 공시실에서 약관을 다운로드 받아 출력하라”고 한다.
무책임한 행동이다. 보험사들은 청약서의 ‘약관수령란’에 서명을 강요해 책임만 피해간 채 소비자들로 하여금 묻지마 가입을 유도하고 있다. 아직까지 금융감독원은 보험사의 이 같은 꼼수에 말이 없다. 개선노력도 없다.
그래서 금융소비자원은 “소비자의 편리를 위해 CD약관의 식별화 작업을 요구한다. 가입자에게 인쇄된 약관과 함께 해당 CD약관을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이것이 힘들다면 차선책으로 CD약관에 식별부호를 의무적으로 부여해 가입자들이 본인의 약관을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개선하자”고 주장했다.
금융소비자원의 오세헌 보험국장은 “세계 어디에도 우리나라처럼 가입자의 편리를 무시한 채 보험약관을 보험사 중심으로 제작해 무성의하게 공급하는 나라는 없다. 보험사들은 지금이라도 소비자 편리를 최우선으로 CD약관의 식별화를 조속히 추진해야 하고,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는 적극 나서서 관련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