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男과 女①] ‘글루미 선데이’, 멜로 장막 속 인간의 이야기

입력 2016-11-02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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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글루미 선데이’가 16년 만에 다시 공개된다. 서로를 동시에 사랑하는 세 남녀를 연기한 배우들의 매력이 진하게 다가온다. 사진은 영화 속 한 장면. 사진제공|그린나래미디어

영화 ‘글루미 선데이’가 16년 만에 다시 공개된다. 서로를 동시에 사랑하는 세 남녀를 연기한 배우들의 매력이 진하게 다가온다. 사진은 영화 속 한 장면. 사진제공|그린나래미디어

■ 16년만에 재개봉 ‘글루미 선데이’

블랙과 화이트, 짜장면과 짬뽕…. 그리고 남(男)과 여(女), 혹은 여와 남. ‘개취’(개인취향)일 뿐인 각기 시선에 성적(젠더·gender) 기준과 잣대를 들이댈 이유는 전혀 없다. 생물학적으로 다른 존재들일지언정,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각자의 취향대로다. 두 남녀기자가 매주 각자의 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적어도 눈치 보는, ‘빨아주기’식 기사는 없다. 엔터테인먼트 각 분야 담당기자들이 ‘갈 데까지 가보자’고 작심했다. 가장 공정하고 정정당당한 시선을 유지하자며.


● 주연: 조아킴 크롤, 에리카 마로잔, 스테파노 디오니시
● 감독: 롤프 슈벨
● 3일 개봉·청소년 관람불가·114분

● 줄거리

194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정한 남자 자보와 연인 일로나가 운영하는 작은 레스토랑에 피아니스트 안드라스가 찾아온다. 안드라스는 일로나에게 첫 눈에 반하고, 직접 작곡한 노래 ‘글루미 선데이’를 선사한다. 그렇게 두 남자와 한 여자는 함께 사랑한다. ‘글루미 선데이’는 엄청난 인기를 얻지만 노래에 빠진 사람들은 연이어 자살하고, 부다페스트는 독일 나치에 점령당한다.



● 히트다 히트

일찌감치 살펴보지 못했던 이야기. 이제야 챙겨보고는 아차 싶었다. 장면은 장면대로, 대사는 대사대로, 진한 감성이 되어 남았다.

영화는 멜로영화라는, ‘진부한’ 틀로 묶인다. 여기서 ‘진부함’이란, 남녀간 사랑의 우울한 비극과 그 파국의 이야기로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물론 이야기는 실제로 얼마간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듯, 끝없는 감성의 흐름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 두 남자를 사랑하는 한 여자. “나를 채워주는 것”과 “내가 갈망하는 것” 사이의 갈등이 숨어 있을 법하지만, 영화는 이 같은 ‘진부한’ 편견을 깨준다.

그 편견과 선입견의 벽을 쓰러뜨리는 건 인간의 이야기인 덕분이다. 한 겹 멜로의 장막을 벗겨내면서 다가오는 인간의 이야기. 결국, 여기, 인간이 있다. 세상의 단순한 상식적 시선 속에서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들의 사랑은 존엄한 인간에 대한 또 다른 애정이다. 그리고 이들이 맞닥뜨리는 파국도 거기로 향하기 위한 과정으로 비친다.

온전한 삶을 꿈꾸는 이들의 일상을 침범하는 세상의 갖은 부조리와 탐욕을 목도하는 현실. 대체 인간의 존엄이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하는 비극적 현재. 여전히 많은 이들이 희망하는 존엄의 삶은 그리도 멀고 먼 것일까.

영화 속 주인공들의 파국은 어쩌면 타인을 위한 희생과 저 깊숙이 쟁여둔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은 가슴을 후벼 파고야 말았다.

‘우울한 일요일’에 딱 보면 좋을 만하겠다. 까닭 모를, 아니 이제는 그 까닭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버리고 난 뒤 찾아온 우울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줄 수도 있겠다 싶다. 재개봉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 평점 아이콘, 이렇게 갑니다




● 히트다 히트
말이 필요할까요. 눈과 귀가 즐겁습니다.



● 알쏭달쏭
지금은 모르겠네요.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 이건 아니야
시간과 돈이 아까울 수 있습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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