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박항서 감독. 사진제공|AFC
국제대회의 우승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데, 이왕이면 돌풍의 기세가 끝까지 가기를 바랐다. 아쉽게도 대회 결승에서 베트남은 우즈베키스탄에 연장후반 14분에 결승골을 내주며 주저앉았다(1-2 패). 119분을 잘 싸우고도 단 1분을 못 버텼다. 승부차기로 갔으면 또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시쳇말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였다. 준우승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사진제공|AFC
국제축구연맹(FIFA)랭킹 112위의 베트남축구는 아시아의 변방이었다. 인기에 비해 성적은 보잘 것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박 감독이 그들의 가능성을 끄집어냈다. 탄탄해진 조직력, 연거푸 벌어진 연장전에서도 지치지 않는 체력, 강인한 정신력 등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박 감독의 조련으로 발견했다.
베트남 팬들이 반한 건 바로 이 부분이다. 대회 기간 내내 베트남 전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의 매직은 9000만 국민들을 들었다놨다했다. 베트남은 2002한일월드컵을 떠올릴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는 국민영웅이 됐다.
경기 후 박 감독의 소회는 남달랐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40일을 보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선수들의 열정과 팬들의 응원 덕분에 힘을 냈다고도 했다. 거스 히딩크가 2002년 4강 신화를 이룬 뒤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헹가레 받는 박항서 감독. 사진제공|AFC
진정성을 보인 덕분에 박 감독과 선수들, 그리고 팬들은 이미 한 몸이 됐다. 그 힘은 곧 축구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서로 믿고 기다려주는 신뢰관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가 이번 대회의 가장 큰 성과일지도 모른다. 아울러 베트남뿐 아니라 그동안 동아시아와 중동에 주눅 들었던 동남아시아 전체에 자신감을 심어준 계기가 됐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베트남 정부는 박 감독의 공로를 인정해 3급 노동훈장을 수여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축하의 말을 전했다. 한국의 이미지 개선은 물론이고 양국간에 교류확대 등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했다.
박 감독은 축구를 통해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할 건 지도자 육성의 중요성이다. 인프라나 시스템, 선수, 관중 등 축구발전을 위한 다양한 요소가 있지만 지도자 육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거스 히딩크 전 축구대표팀 감독.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우리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한 국가의 축구혁명을 일으킨 사례를 2002년을 통해 직접 경험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히딩크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한국축구를 월드컵 4강으로 이끌었다. 박 감독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은 물론 히딩크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1년6개월간 함께 하며 많은 걸 배웠다. 좋은 지도자 밑에서 좋은 제자, 좋은 선수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현대축구의 흐름을 읽고, 수준 높은 지도방식을 익힌 지도자를 육성해야하는 이유다.
지도자와 선수의 수준은 정비례한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축구 선진국들은 선수뿐 아니라 세계적인 지도자도 배출하고 있다. 이 지도자들의 활약은 선수 못지않다. 우리는 그동안 이 부분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국내 지도자들이 해외에 많이 진출했으면 한다. 제2의 박항서를 만드는 게 얼마나 보람된 일인지 우리는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았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