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스포츠] 베이브 루스의 건망증과 사인

입력 2018-07-31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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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브 루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역대 야구선수 가운데 베이브 루스만큼 사인에 영향 받지 않고 야구를 한 선수는 없다. 루스는 1919년 마지막 데드볼시대에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으로 29개의 홈런을 때렸다. 1920년 메이저리그에 반발력이 좋은 공이 도입됐는데, 뉴욕 양키스로 옮겨간 루스는 58개의 홈런과 장타율 0.847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록을 달성했다. 이 장타율은 2001년 배리 본즈(0.863)가 깨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꿈의 수치였다.


● 1920년부터 메이저리그에 홈런이 늘어난 다양한 이유들

공교롭게도 1920년 뉴욕 양키스는 메이저리그 구단 사상 처음으로 관중수입 100만 달러를 돌파했다. 다른 구단보다 2배 이상의 관중이 구장을 찾았다. 데드볼의 시대가 끝나고 라이브볼 시대가 오면서 홈런이 급속히 늘어났지만 오직 공 때문만이 아니었다. 다른 변화도 함께 있었다.

1920년부터 메이저리그는 스핏볼과 함께 다른 반칙투구도 금지했다. 다만 그 당시까지 스핏볼을 주무기로 해온 17명의 선수는 은퇴할 때까지 예외로 인정해줬다. 1920년 홈런이 급증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동안은 짠돌이 구단주들이 경기구 사용에 인색했다. 쓰던 공을 계속 쓸 것을 요구했다. 그러다보니 공 하나로 몇 이닝을 소화했고, 어떤 경기는 공 하나로 끝냈다. 공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라운드의 흙이 묻고 표면이 찢어진 데다, 선수들의 침과 담배즙으로 얼룩진 공으로 경기를 하다보니 사고가 났다. 로이 채프만의 비극이었다.

1920년 8월 16일 벌어진 뉴욕 양키스-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경기에서 양키스의 잠수함 투수 칼 메이스의 공에 머리를 강타당한 채프만이 사망했다. 그 사고를 계기로 심판들은 경기 도중 자주 새로운 공으로 교체했다. 이런 다양한 변화는 타격지표를 모두 상승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베이브 루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라이브볼 시대, 루스에게 사인을 알아야 할 이유를 없애주다

새로운 야구환경의 변화가 얼마나 루스에게 유리했는지는 이전에 활약했던 선수들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쉽게 드러난다. 1900∼1910년 메이저리그 최다홈런 타자 3명은 합계 18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10∼1919년 최고의 홈런타자 3명은 합계 275개의 홈런을 때렸다.

20년 동안 리그 최고의 홈런타자 6명이 457개의 홈런을 기록한 반면 루스는 1920∼1929년 혼자서 무려 467개의 홈런을 때렸다. 이런 야구의 혁명적 변화에 따라 루스는 사인 중심의 스몰볼 야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야구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린 루스도 나이를 먹었다. 현역 유니폼을 벗을 때가 가까워진 루스는 감독을 평생의 꿈으로 여겼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루스는 사인에 젬병이었다. 사인을 기억하지 못했다. 현역시절 강하게 때리라는 것 외에 다른 사인이 나올 리가 없었기에 평소 사인을 공부할 기회도 없었다.

양키스를 나와 여기저기 방황했던 루스는 1938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코치가 됐다. 1루 코치박스에 나갔지만 벤치의 사인을 잊어버려 헤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다저스의 주장이자 유격수였던 리오 듀로서는 “루스가 덕아웃에서 코치박스로 걸어가는 동안 사인을 까먹는다”고 불평했다.

사실 루스는 평생 무엇을 제대로 기억해본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같은 유니폼을 입은 동료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루스가 루 게릭의 은퇴식 때까지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는 소문도 있다.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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