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IMF 외환위기의 긴박한 순간을 담은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영화는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두면서도 등장인물과 이야기 대부분은 허구의 상상력으로 완성했다. 영화 주인공인 김혜수, 조우진, 유아인, 허준호(왼쪽부터).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통화전문가·투자자·고위관료 생존전쟁
김혜수·유아인·허준호 등 미친 연기력
위기의 현대사 아래 우리의 현주소 빗대
마음이 묵직해지는 관객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김혜수는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 이렇게 말한다. “위기에 또 당하지 않기 위해선 잊지 말아야 해요”라고 말이다. 21년 전 일어난 국가 부도 위기의 긴박한 순간을 스크린에 펼쳐낸 영화가 주인공의 입을 통해 관객에 건네는 메시지다.
잊으면 안 될, 잊혀지면 더더욱 안 될 현대사의 중요한 기점이 영화로 완성됐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다룬 ‘국가 부도의 날’(감독 최국희·제작 영화사집)이다. 19일 언론시사회를 통해 이야기를 공개한 영화에서 마주한 21년 전 11월을 지켜보는 일은 힘겹기만 하다. 김혜수부터 허준호, 조우진, 유아인까지 쟁쟁한 배우가 전면에서 ‘미친 연기력’을 과시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이들보다 ‘IMF 외환위기’ 자체라고 봐도 될 만큼 시대 상황을 담는 데 충실하다.
영화는 “국민의 80%가 중산층”이라 믿고, OECD 가입에 한껏 도취된 대한민국을 비추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내실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국가 신용등급의 연이은 하락, 바닥으로 치닫는 외환보유고, 중소기업부터 대기업에 이르는 연쇄부도가 쉼 없이 일어난다.
그런데도 정부는 위기 사실을 감추는 데 급급하고, 혼돈의 상황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각자의 신념을 이뤄나간다. 미국에 휘둘리는 IMF의 지원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한국은행 통화전문가 김혜수, 위기를 기회삼아 위험천만한 투자로 성공하는 유아인, “판을 바꾸겠다”면서 대기업 등 기득권을 대변하는 고위 관료 조우진이 빈틈없는 삼각구도를 이룬다. 여기에 허준호는 당대 중년 가장의 얼굴을 대변한다. 이들 모두 현실감 넘치는 연기를 통해 21년 전 그날들을 소환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는 ‘IMF 당시 비공개 대응팀이 있었다’는 한 줄 기사로부터 출발, 허구의 상상력으로 만든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를 그저 사실에 기반을 둔 허구로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중간 중간 당시 뉴스 화면을 속도감 있게 배치, 외환위기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느낌도 던진다. 때문에 보고나면 통쾌함이나 가뿐한 기분을 느끼긴 어렵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향한 ‘고민’을 안긴다. 이런 면에서 최근 등장한 현대사 소재 영화들 가운데 가장 유의미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극본 자체도 탄탄하지만 무엇보다 이를 구현한 몫은 배우들이다. 이날 시사회 이후 진행된 간담회에서 만난 배우들에게선 어떠한 ‘사명감’도 엿보였다. 김혜수는 “고통스러운 현대사 가운데 현재 우리 삶을 바꿔놓은 분기점 같은 기간을 담았다”며 “영화의 메시지는 2018년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조우진은 “시대를 간접 체험하는 데 있어서 영화만한 장르는 없는 것 같다”며 “없었던 일을 마냥 긍정할 수 없듯, 있었던 일을 마냥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통해 돌아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