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으로 앞선 7회초, 두 번째 타석이었던 4회초 1사 후 류현진(LA 다저스)에게서 볼넷을 얻었던 브라이언 도저(워싱턴 내셔널스)가 선두타자로 들어섰다. 볼카운트 1B-2S서 4구째 시속 147㎞짜리 직구(포심패스트볼)가 몸쪽으로 파고들자 도저는 눈만 깜빡인 채 삼진을 당했다. 덕아웃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류현진의 동료 투수 리치 힐은 감탄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13일(한국시간)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워싱턴과 홈경기에 선발등판한 류현진은 8회까지 26명의 타자를 맞아 안타와 볼넷을 1개씩만 내준 채 삼진은 무려 9개를 잡았다. 삼진 하나하나가 상대의 허를 찌르는 볼 배합의 승리 덕분이었는데, 특히 7회 도저의 루킹 삼진은 압권이었다. 완성도 높은 다양한 종류의 공을 주로 바깥쪽으로 구사하던 류현진이 몸쪽을 공략하자 도저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고, 덕아웃에서 동료 류현진의 현란한 볼 배합을 음미하며 나름대로 다음 투구를 예상하던 힐마저도 박수를 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볼이 포수의 미트에 꽂힌 것이다.
올 시즌 류현진의 피칭은 잔뜩 물이 오른 느낌이다. 직구, 투심패스트볼, 컷패스트볼(커터)의 3종류 패스트볼 계열과 더불어 주무기 체인지업에 커브, 슬라이더를 자유자재로 섞고 있다. 이날은 투심패스트볼을 6개로 최소화하는 대신 직구(38개)와 커터(27개)의 비중을 높였다. 체인지업도 33개를 던졌다. 커브는 11개, 슬라이더는 1개였다.
가장 돋보인 대목은 총 6종류의 레퍼토리를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는 곳으로 완벽하게 던진 볼 배합이었다. ‘두뇌피칭’의 진수를 보여줬다. 완성도 높은 다양한 구종과 자로 잰 듯 정확한 컨트롤이 뒷받침되어야 함은 당연하지만, 상대를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려면 궁극적으로는 의표를 찌르는 볼 배합이 필수다.
올 시즌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의 진화는 마치 인공지능(AI)이 인간을 넘어선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알고리즘(문제해결을 위한 명령들로 구성된 일련의 순서 또는 절차)의 진화를 연상시킨다. AI가 입력된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특정 상황에 최적화된 해법을 내놓으려면 알고리즘이 정교해야 한다. 스코어와 볼 카운트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타자의 생각을 읽고, 6개의 구종 중 하나를 어느 코스로 찔러야 할지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순간적으로 선택하는 류현진의 피칭 알고리즘이 딱 그렇다. 워싱턴전은 정점에 이른 류현진의 두뇌피칭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표본과도 같은 경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