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용 의원
자신과의 혹독한 싸움을 극복해낸 ‘철인’이지만, 지도자와 선배들의 지속적 폭력과 가혹행위는 이길 수 없었다.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국가대표 출신 고 최숙현은 지난달 26일 어머니에게 서글픈 문자메시지 한 통만을 남긴 채 세상을 등졌다. 가장 따뜻하게 대해주고 지켜줬어야 할 전 소속팀 경주시청 지도자들(감독·운동처방사)과 선수들은 고인에게 잔혹한 고통을 가했다.
또 한 가지 참담한 사실은 고인의 고통을 ‘비극’으로 끝나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수년 간 가해자들의 폭압에 시달렸던 고인은 견디다 못해 올해 초부터 체육계 곳곳에 간절한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그러나 누구도 고인의 ‘SOS’에 응답하지 않았다.
특히 대한체육회의 미온적 대처는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는 4월 8일 고인으로부터 폭력신고를 접수했다. “피해자의 연령과 성별을 감안해 여성조사관을 배정해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라는 체육회의 노력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 후에는 방치였다. 신고 후 2개월여 동안 가해자들은 그간의 잘못을 수습하는 시간을 벌었다. 고인이 극단적 선택을 한 뒤에야 체육회는 다시 움직였다. 사건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1일 “해당 사건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나 은폐 의혹에 대해 클린스포츠센터 및 경북체육회 등 관계기관 감사 및 조사를 검토 중”이란 짧은 입장문을 발표했다. 비인기종목, 지역운동부만의 잘못으로 돌리는 전형적 ‘꼬리 자르기’에 많은 이들은 혀를 찼다.
불미스러운 사태가 터질 때마다 반복되는 변명이 있다. “수사 중이라 조치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한국스포츠를 총괄하는 체육회는 적극적으로 움직였어야 마땅했다. 인권은 세상 그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조차 폭력과 성폭력을 피할 수 없는 한국스포츠다. 사각지대라고 방치하는 대신 가해 의혹이 있는 인물들의 직무를 일시 정지하고 경위를 파악하는 정도의 정성은 쏟았어야 했다. 2일 재차 발표한 성명서에서 체육회는 “가해자들을 단호히 처벌해 다시는 체육계에 발을 들일 수 없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동안에는 왜 외면했는지도 밝혀야 한다. 조사 방식과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역도, 유도, 쇼트트랙 등 종목을 불문하고 추문이 터질 때마다 체육회는 “발본색원”을 외쳤고,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슷한 일은 늘 되풀이되고 있다. 현장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스포츠의 현실은 여전히 정의와 공정이 통하지 않는 ‘그들만의 세상’인지 모른다.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