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로 일탈을 꿈꿨던 예원학교 소녀,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되어 재즈와 재회하다

입력 2021-05-09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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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

첼리스트이자 베이징 중앙음악원 교수 임희영
7일 첫 크로스오버 음반, 소니에서 출시
재즈 스탠더드, 영화 OST 8곡 전용준 트리오와 연주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즉흥연주 폭발
전국에서 클래식 음악가를 꿈꾸는 어린 천재들이 모여드는 예원학교에 재즈를 좋아하는 소녀가 있었다. 체구에 비해 훌쩍 커 보이는 첼로를 등에 멘 소녀는 방과 후 동네 레코드 가게에 들러 재즈 음반을 사는 것이 큰 낙이었는데, 이는 그만의 작지만 통쾌한 ‘일탈’이기도 했다.

“베이스 주자의 재치 넘치는 애드리브, 깃털처럼 가볍게 추임새를 넣다가 듣는 이의 몸을 들썩이게 하는 리듬의 드럼, 사이다와 같은 청량감을 주는 피아노의 즉흥연주를 깊은 밤, 넋을 잃으며 몇 시간이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재즈를 사랑했던 예원학교의 소녀는 훗날 세계 클래식 음악계가 주목하는 첼리스트가 됐으니, 그가 바로 임희영이다. 그에게는 늘 명문 로테르담 필하모닉의 동양인 최초 수석 첼리스트, 중국 최고의 베이징 중앙음악원 한국인 최초 교수라는 타이틀이 따라 다닌다.

임희영이 5월 7일 특별한 음반을 냈다. 개인적으로 그의 네 번째 정규음반으로 소니 클래시컬 브랜드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앞서 낸 석장의 음반이 정통 클래식 음반이었던 반면 이번 음반은 임희영의 첫 크로스오버 음반이다. 크로스오버의 대상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작지만 의미있는 일탈을 선사했던 재즈, 그리고 영화음악이다.

음반의 타이틀은 ‘As Time Goes By’. 잉글리드 버그만,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1942년 흑백영화 ‘카사블랑카’의 주제곡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하먼 후프펠드가 1931년 작곡, 작사한 발라드였다. 번역하면 ‘시간이 흐르듯이’ 정도가 되겠지만, 원어가 훨씬 더 풍부한 느낌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임희영의 새 음반에는 모두 8곡이 수록되어 있다. 재즈 피아니스트 에롤 가너의 아름다운 ‘미스티(Misty)’로 시작해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동명의 주제곡(Last Tango in Paris)으로 마친다.
8곡 중 클래식 레퍼토리는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이 유일하다. 흥미롭게도 이 곡은 첼리스트 임희영이 “평소 피아노로 즐겨 치는 곡”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느린 템포의 곡들을 골랐다. 보사노바 리듬인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The Girl from Ipanema)’를 제외하면 모두 느리고 정적인 분위기의 곡들이다. 임희영은 “첼로는 바이올린처럼 화려하고 기교적인 면을 뽐내기보다 시적이고 노래하는 멜로디를 연주할 때 장점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것 같다. 여러 템포의 곡들을 연주해 봤는데, 첼로의 서정적인 면이 최대한 드러날 수 있는 곡들을 위주로 선곡하다보니 의도치 않게 느린 곡들이 모이게 됐다”고 했다.

임희영의 클래시컬한 첼로 연주에 재즈의 맛과 풍미를 더한 존재는 프로듀서 김주환과 전용준 재즈 트리오다. 국내 재즈계의 스타 보컬리스트 김주환이 이 음반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음반을 들어보면 전체적으로 빈티지한 사운드를 느낄 수 있다. 고색창연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딘지 아련하게 낡아 있다. 이 독특한 분위기의 사운드는 김주환이 만들어냈다. 클래식과 재즈의 조합인 만큼 첼로의 소리와 재즈의 분위기를 동시에 살리기 위한 고심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임희영의 첼로는 과장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과도하게 절제하지도 않은 연주다. 소리가 투명해 연주자의 감성이 순간순간 손으로 만져질 것 같다.
임희영은 두께를 증폭시켜 드라마틱한 소리를 만들지 않은 대신 매우 스타일리시한 느낌의 사운드를 우려냈다. ‘첼로는 노래하는 악기’라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소리다. ‘그래, 이게 첼로지’ 싶어진다.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연주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이 곡들을 준비하면서 음악적으로 고민이 되었던 것은 클래식 연주자로서 어느 선까지 일탈이 가능할지였다. 고민 끝에 반주는 재즈풍으로 가되 나는 클래식과 다를 바 없이 평소대로 자연스럽게 연주해 두 장르가 무리없이 어우러지도록 하기로 했다.”

이 음반을 듣는 재미가 하나 더 있다.
보통 이런 음악은 듣는 동안 자연스럽게 추억 또는 특정한 장소를 떠올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재즈라면 어두운 조명, 담배연기가 자욱한 재즈클럽이 떠오른다. 클래식이라면 좀더 밝고 단정한 분위기의 장소가 될 것이다.

사진제공 | 소니뮤직엔터테인먼트코리아


그런데 이 음반의 음악들은 좀 더 각별한 장소로 듣는 이들을 데리고 간다. 그곳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장소일 가능성이 큰 데, 이를테면 작곡가의 자리다. 사연이 있는 오래된 카페. 안쪽에서는 카페만큼이나 오래된 스피커에서 재즈가 흘러나오고, 작곡가는 도로변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 몇 잔째 커피를 홀짝이며 오선지에 슥슥 악보를 그리고 있다. 그러다 만족할 만한 악상이 떠오르면 짧은 동기를 흥얼거리다 웨이터에게 손짓해 커피 한 잔을 추가 주문하고. 뭐, 이런 풍경. 이런 장소.

임희영이 연주하는 ‘미스티’에서는, ‘문리버(Moon River)’와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에서는 이런 그림이 저절로 슥슥 그려지는 것이다.

종종 그의 연주는 관조의 느낌을 풍기는데 ‘오버 더 레인보우’가 특히 그렇다. 이 곡에서는 베이스와 함께 브러시로 살금살금 연주하던 드럼마저 퇴장해 버린다. 그 결과 첼로와 피아노의 담백한 이중주가 남게 되는데, 이들이 빚어내는 무지개는 상당히 회고적이다. “저 무지개를 향해 나아가 보자”라기 보다는 “내게도 무지개를 좇던 때가 있었지”하고 미소 짓게 만드는 연주인 것이다.

이쯤에서 물을 때가 되었다. 이 음반이 왜 크로스오버인지. 혹은 크로스오버여야 했는지.
“클래식 연주자가 이런 저런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해 보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조심스러운 면도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사상초유의 사태를 맞으며 나 역시 일상이 정지된 지난 한해를 보내며 앞으로 대중 앞에서 어떤 음악을 연주해야할지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어떤 분야의 음악을 연주하든지 대중과 소통하며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음악가가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며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 시대의 연주자에게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고, 크로스오버를 시도하게 됐다.”

임희영은 “이 음반을 들으면서 잠시나마 삶의 고단함과 지친 마음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이 음반의 하이라이트이자 화룡점정은 역시 마지막 트랙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일 것이다. 이 음반을 크로스오버이자 첼리스트와 재즈 아티스트의 컬래버레이션적 시각에서 본다면 그 시도, 실험의 정점과 지향점은 이 곡에 함축되어 있다.
‘마지막 탱고’에서는 첼로의 반주자, 보조적 파트너 자리에 있던 재즈 연주자들이 “마지막 곡이니 우리도 좀 해볼까요?” 하는 듯 스윽 앞으로 나서는 것이다. 피아노의 멋진 솔로를 시작으로 베이스, 드럼으로 이어지는 임프로바이제이션이 재즈의 매력을 분출한다.
놀라운 것은 이 즉흥성을 첼로가 이어받는 장면인데 이게 상당히 강렬해 곡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엇, 임희영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어지는 이 음반의 ‘명장면’으로, 사실 임희영은 현대음악에도 깊은 관심과 조예가 있는 연주자인 것이다.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야콥 얀코프스키의 첼로 소나타, 미국 콜럼비아 음대 초청으로 피터 서서의 첼로 모음곡을 초연하는 등 현대 유명 작곡가들의 작품을 초연한 사례가 있다.

임희영이 연주한 첼로 파트의 즉흥연주는 곡을 정상으로 끌고 올라간 뒤 뜨거운 화산 같은 클라이맥스를 찍고 마무리한다. 그 긴박함이 묘한 쾌감을 안겨준다. 한 곡의 끝이자, 음반 전곡의 마침표여서일까. 다른 곡에 비해 여운도, 여음도 길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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