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즌부터 2년간 대한항공의 조종간을 새로 잡는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34)이 선수들과 본격 훈련에 돌입했다. 지난달 10일 입국한 뒤 2주간의 자가격리를 마치고 경기도 용인 대한항공 훈련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조금씩 몸으로 서로를 익히고 있다.
전임 로베르토 산틸리 감독은 기존 대한항공의 배구에 자신의 성격을 닮은 매운 소스를 곁들였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사상 첫 외국인감독의 통합우승이란 성과를 냈다. 오랫동안 꿈꿨던 정상을 경험한 대한항공을 이제 새로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가야 할 틸리카이넨 감독의 배구는 어떨까.
조심스러운 접근과 놀이 같은 훈련
틸리카이넨 감독과 대한항공 선수들은 서로를 조심스럽게 알아가는 단계다. 일단 선수들은 감독의 훈련방식이 너무 파격적이라는 데 가장 놀랐다. 공을 가지고 하는 훈련이 아니라 놀이처럼 보이는 방식에 내심 걱정하는 선수도 나왔다. ‘훈련이 너무 가볍다. 이래도 될까’라는 생각이다.
오전 훈련 때 선수들은 2명씩 계속 돌아가면서 장난치듯 공을 주고받는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배구를 막 시작하는 초등학생들이 주로 하는 기본적 연결 훈련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가 있다. 센터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의 선수들이 용감하게 속공 연결을 할 수 있는 팀을 만들려고 한다.
아직 어느 팀도 이런 배구를 시도해본 적은 없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반드시 3번의 연결로 공격할 필요도 없고, 가능하면 한두 번에 공격을 마치라”고 주문했다.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연결의 정확성’이다.
새 감독은 자가 격리가 끝나자마자 코칭스태프, 트레이너, 선수들로 나눠 따로 미팅을 했다. 지금은 선수들과 1대1 면담을 이어가고 있다. 이미 대한항공이 어떤 팀이고, 어떤 방식의 배구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격리기간 중 지난 시즌 대한항공의 모든 경기 영상도 봤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플레이보다는 그런 플레이를 하는 사람을 더 알고 싶어 한다. 먼 여행을 떠나기 위해선 동반자들끼리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틸리카이넨 감독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외국인감독을 이미 경험했던 대한항공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프런트는 조심스럽게 새 사령탑에게 다가서고 있다. 일단 배구를 아주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은 알았다. 다만 지금의 좋은 관계와 선수들을 향한 부드러운 접근방식, 제스처가 시즌 도중 성적이라는 변수를 만났을 때 급변할 수 있기에 확신하진 못하는 눈치다. 이 부분은 시즌을 헤쳐 나가면서 서로의 신뢰가 차곡차곡 쌓여야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반복적 훈련보다는 실전 같은 연습경기를 통해 완성을 추구하는 스타일은 전임 감독과 비슷하다. 오전에는 볼 운동, 오후에는 웨이트트레이닝을 한다. 산틸리 감독도 이 방식을 택했다. 이미 유럽리그의 많은 팀들에서 진행하는 방식이다. 여자배구 도로공사도 터키에서 연수를 마치고 온 박종익 수석코치의 제안으로 이 훈련 스케줄을 따르기 시작했다.
새 감독은 선수들이 포지션별로 따로 훈련하는 방식을 싫어한다. 모든 선수가 함께 실전 상황에 맞춰 훈련하는 것을 원한다. 이를 위해 구단에 훈련장 코트를 더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구단은 즉시 훈련장에 새 기둥을 설치하고 있다. 기둥 설치비용은 무려 개당 750만 원이다. 선수들이 2~3개의 코트에서 쉼 없이 돌아가며 훈련하는 방식을 꿈꾸는 새 감독은 전임 감독과 접점이 또 있다.
프로라면 각자 역할을 잘 안다고 믿는 감독
선수들에게 몸을 푸는 시간을 따로 주지 않는다. 오전 9시30분 훈련을 시작한다고 하면 그 때부터 곧바로 훈련 시작이다. 지난 시즌 이 방식이 익숙하지 않아 혼란을 겪었던 대한항공 선수들이 이번에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주장 한선수보다 세 살 어린 나이로만 본다면 새로운 기계의 사용에 익숙할 것 같지만, 의외로 복고풍이다. 요즘 세대들이 손에서 놓지 않는 태블릿PC 대신 화이트보드에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가며 상황을 설명한다. 선수들이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는 동안에는 코치들과 함께 배구 영상을 자주 본다. 이 때 자신이 원하는 배구와 플레이가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물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지 않는다. 코치들의 의견도 묻는다. 자신이 앞장서기보다는 스태프와 함께 걸어가야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구단은 이미 새 감독에게 소통의 중요성을 넌지시 알려줬다. 그는 “잘 알고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진정한 프로라면 선수는 선수답게, 감독은 감독답게 각자가 할 역할을 잘 안다”고 답했다.
플레이만 빠른 게 아니라 생각의 스피드와 유연성, 창의력을 강조하는 배구에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흥미를 가지고 있다. 틸리카이넨 감독은 “선수들의 배구 이해도가 떨어지면 어렵겠지만 대한항공은 그런 능력을 갖췄다”며 새로운 배구의 성공을 확신한다.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감독을 모시고 새 배구항로를 개척해야 하는 최부식 코치는 “되기만 하면 아주 재미있겠다는 기대감을 준다”고 말했다. 선참 선수들도 비슷한 생각으로 새 배구를 따르려고 한다. 완성까지 시행착오도 겪겠지만, 대한항공 점보스는 새 항로를 찾아 이륙했다.
김종건 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