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미술가’ 허진권 작가 개인전 “그가 물고기를 그리는 이유” [전시]

입력 2021-11-17 1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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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8~23일 대전 문화공간 ‘주차’에서 개인전 개최
-‘프롤레고메나’ 평화, 통일에 대한 순수한 예술적 접근
-“물고기는 자화상, 평화는 일상과 나로부터 시작돼”
“물고기는 이제 마치 제 자화상 같습니다.”

허진권 작가(목원대 명예교수)의 작품에는 물고기의 형상이 다수 등장한다. 물고기는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지만 작가의 작품 속 물고기는 종교를 넘어 ‘그 무언가’를 좀 더 이야기하고 있다.


그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작가의 전시를 찾는 것이다. ‘평화와 통일의 프롤레고메나-PEACE 쓰기’로 전국을 순회하며 현장 작업을 하고 있는 허 작가의 제42회 개인전이 11월 18~23일 대전시 중구 대흥로 157번길 40-12 문화공간 주차에서 열린다.

전시에서는 자연현장에서 진행한 현장작업의 기록물을 회화로 수용한 작품 153점을 만날 수 있다. 거대한 물고기 형상으로 설치한 작품, 주방기구에 그린 물고기, 어린이들이 ‘PEACE’를 쓰는 모습 등을 담은 작품들로 이른바 ‘허진권의 PEAC쓰기 153 프로젝트’의 결실이다.


허 작가는 목원대 미술교육과 학사, 경희대 대학원에서 동양화 전공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88년부터 모교인 목원대에서 교수(미술디자인대학 미술학부 기독교미술전공)로 후진을 양성하다 지난해 8월 말 정년퇴임했다. 200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미술과를 창설했으며 제20대 목원대 교수협의회장, 목원대 미술대 학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해 9월 교수 퇴임전을 가졌던 허 작가는 스포츠동아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제 온전히 작품 활동에만 매진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전시의 타이틀에는 낯선 단어가 눈에 띈다.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는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저서 제목이다. ‘학문에 대한 서설(序說)’이라는 의미로 칸트가 ‘순수이성비판’를 간행한 후 이를 분석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허 작가에게 ‘프롤레고메나’는 어떤 의미일까.
“순수(純粹)입니다. 우리가 평화와 통일을 이야기하지만 이 평화와 통일이 각자의 정치적, 경제적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것을 봅니다. 저는 예술가로서 될 수 있는 한 순수하게 접근해 보자는 것이죠. 그게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허 작가는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그의 작품은 동양화의 울타리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허 작가는 스스로를 ‘자연미술가(Nature Artist)’로 규정한다. 물고기는 그의 ‘자연’을 대표하는 아이템이자 아이콘이다.

“성경에는 누구나 다 아는 오병이어 이야기와 함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져라’하셔서 물고기 153마리를 잡은 이야기 등이 나와 있습니다. 물고기는 기독교의 중요한 상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허 작가가 자신의 예술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소재로 물고기를 선택한 데에는 그의 개인적인 체험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허 작가는 충남 보령의 작은 섬인 원산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농사를 지으면서 물고기도 잡는 ‘반농반어’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허 작가는 “초등학교 시절까지 배 한 번 못 타봤다. 어려서부터 매일 물고기를 접하다보니 이제는 물고기가 마치 내 자화상 같다”며 웃었다.
원산도는 요즘 화제의 지역이다. 국내 최장, 세계 5위 규모의 충남 보령해저터널(6.92km)이 12월 1일 개통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허 작가의 작품 속 물고기는 기독교의 상징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그가 물고기를 통해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평화’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이지만 허 작가는 사랑보다 평화가 더 상위 단계라고 보았다. 구원이 있고, 천국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평화의 상태일 것이다.
오랜 고민과 함께 허 작가는 목사, 신학자들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 대해 확신을 얻게 됐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순수한 평화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제 작업은 그것을 제 나름대로 예술적으로 표현해보고 있는 것이죠.”


허 작가의 작품을 보면 화폭 가득 단색의 점들이 발견된다. 작품 속 점들은 동양화의 핵심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주로 점들로 표현되는 물고기들은 프라이팬, 냄비, 도마, 수건 등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되는 사물과 함께 등장하곤 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누구든지 일상에서, 여행을 갈 때조차 매일 접하게 되는 생활필수품들을 즐겨 작품에 활용한다”고 했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평화가 시작된다”라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곳’은 곧 ‘나’이기도 하다.


눈길을 끄는 작품들은 또 있다. 방역복을 입은 사람,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에 캔버스를 세워놓고 ‘PEACE’를 쓰고 있는 남성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허 작가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여러 차례 진행하며 생태계의 파괴가 인간의 탐욕에 의한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해 왔다. 작품 속의 남성은 곧 작가 자신의 모습이다.

생태계를 보존하는 일은 우리 주변의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프라이팬 속의 물고기는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콧노래를 부르며 프라이팬에 요리를 하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행복하게 된다. 잠시의 휴식이 될 수도 있다. 프라이팬 속, 냄비 속, 수건 속의 물고기는 이렇듯 작지만 소중한 평화, 행복, 휴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로운 제작 뒷이야기 하나. 허 작가는 자연 현장에서 진행한 퍼포먼스(작가는 ‘현장작업’이라고 설명했다)를 사진에 담고, 그 기록물 위에 그림을 그렸다. 사진을 출력하고 여기에 연출을 더한다. 작품 속 작가의 모습 역시 이렇게 완성됐다.

허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기를 바라고 있을까. “굳이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 작가의 요청이다.
“답을 찾으려고 하거나 작가의 의도를 보려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본인 나름대로 뭔가 궁금한 문제 하나쯤 갖고 돌아가실 수 있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전시장에서 재잘거리며 전을 부치고 나눠 먹는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은 물론 생각을 하게 되니 지각에 이르기까지 인체의 6감 모든 곳을 두드리게 된다. ‘전 부치는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이렇게 6감에 호소하며 서로 소통하니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 예술은 특정부위에 장애가 있으면 접근이 어려웠다. 하나, 이렇게 전시장에서 전을 부치는 퍼포먼스를 하여 6감에 호소함으로써 그 어느 한 가지 감각만 살아있다 해도 예술행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니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로 평화인 것이다.”
(2021년 11월 20일. 문화공간 주차 전시 중인 허진권 작가)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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