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음악에 살인사건을 때려넣은 희대의 뮤지컬’ 리지 [공연리뷰]

입력 2022-04-19 1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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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미국에서 벌어졌던 실제 살인 사건의 미스터리를 다룬 뮤지컬 리지.
어둡고 무거운 소재를 공포, 분노, 전율, 불안, 성, 배신, 음모로 풀었다.
이 모든 어둠의 소재를 관객의 심장을 갉아대는 듯 디스토션 사운드가 난무하는 록 음악의 거대한 스프 통에 쏟아 넣고 펄펄 끓여 버렸다.

20세기 말 고딕 록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
눈을 강조한 강렬한 메이크업,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의상.
분노와 쾌락을 뒤섞어 놓은 듯한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
리지는 희대의 실제 살인사건 스토리를 록 음악으로 푼 것이 아니라, 록 음악에 스토리를 때려 넣은 ‘희대의’ 뮤지컬이다.


4명의 여배우만 출연하는 이 작품은 당연히 록의 감성을 배우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리뷰를 위해 관극한 날에는 유리아(리지 보든), 이영미(브리짓 설리번), 제이민(앨리스 러셀), 김려원(엠마 보든)이 캐스트 보드에 있었다.

이 4명의 프로필에는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전원 헤드윅의 이츠학 출신들이라는 것. 이 중에서도 이영미는 두 말이 필요없는, 이츠학의 또 다른 이름이라 불려 마땅한 인물이다.
4명의 전·현직 이츠학들은 헤드윅에서 못 다 보여준 ‘록삘’을 리지에서 대폭발 시켜버린다. 헤드윅의 팬들은 리지에 이 4명이 출연하는 날을 아예 ‘이츠학 데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리지 보든은 비참과 모멸을 연료로 삼아 분노를 쌓아올리고 마침내 광기를 사르는 캐릭터다. 유리아의 처절한 연기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온다. 리지의 넘버 ‘사랑 아냐(This is not love)’는 절창.
보든가의 가정부인 브리짓 설리번은 ‘레베카’의 댄버스를 연상하게 하지만 훨씬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천박하면서도 영리한 인물이지만 비겁하지 않다. 이영미의 브리짓 설리번은 꽤 육감적인 매력마저 풍긴다.

보든가의 이웃에 사는 앨리스 러셀은 이 사건의 중요한 키를 쥐고 있다. 리지 보든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섬세한 연기를 요구하는 캐릭터로 제이민이 잘 표현했다. 리지 보든을 유혹하며 부르는 ‘있어 줄래?(Will you stay)’가 추천 넘버.



아버지와 계모에 대한 분노로 가슴이 끓고 있는 리지의 언니 엠마 보든. 캐릭터를 드러내기 위해 김려원이 중성적인 굵은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지난해 김려원이 선보였던 싱글 ‘Lonely Night’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이 목소리는 동생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엠마의 캐릭터를 단숨에 보여준다.

리지에서 몇 가지 눈길을 붙잡았던 장면들이 있다.
리지 보든이 독백같은 솔로 넘버를 부르는 동안 무대 양 사이드에서는 각각 한 명씩의 배우가 리지 보든과 동일한 몸짓을 연기한다. 리지 보든의 내면을 비추는 두 개의 거울처럼 여겨지는 이 장면은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


리지 보든을 유혹하던 앨리스. 세레나데처럼 달콤했던 유혹은 리지 보든이 자신을 거부하자 순식간에 거친 록으로 돌변하게 되는데 이 장면은 상당히 근사하다. 제이민의 연기도, 연출도 다 좋았다.

살인 사건 후 앨리스를 제외한 3명은 모두 19세기풍의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블랙룩으로 변모한다. 마지막으로 판사 앞에서 증언을 뒤집은 앨리스 역시 드레스를 벗고 안에 입고 있던 블랙 의상을 노출시킨다.

블랙 의상은 힘, 록, 저항, 자유, 동질과 같은 단어들을 상징하고 있을 텐데 흥미롭게도 장례식 의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죽은 남녀에 대한 이들의 ‘애도’는 통상의 애도와는 매우 다를 것이지만.

여기에 리지 보든과 앨리스의 유혹과 설득(리프라이즈) 장면은 은근히 에로틱한 상상을 자극한다.


관극하고 난 후 몸과 마음에 몸살기가 들어왔다.
가뜩이나 바닥이 보이는 기운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리고, 축 늘어진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 뮤지컬을 대표하는 넘버인 ‘마흔 번의 도끼질(Forty Whacks)’을 당한 느낌. 부디 관극 전 공연장 앞에서 홍삼 한 봉지 드시고 들어가시라.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쇼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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